칼럼

제목 ‘영문 밖’의 ‘대속제물’- 창 22장에 대한 신학적 명상 2: ‘이삭’과 ‘예수’ 사이의 동형 이론 - 김이곤 2012-06-112021-10-20 14:53

아브라함이 나이 100세 때 얻은 외아들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의 아들이었다나이 75세 되던 때아브라함은 그의 하나님으로부터 한 특별한 소명(召命)을 받고즉시 그 명()대로 고향을 떠나 유랑의 나그네라는 순례생활을 시작한지 꼭 만 25드디어아들을 주시겠다는 신()의 약속이(창 15:4; 18:14) 성취되어 얻게 된 바로 그 외아들이 이삭이었다물론아브라함이 잠시 믿음의 본궤도를 떠나당시의 관습(쉬프카[대리모]관습)에 따라 아내의 몸종(쉬프카하갈을 통하여 이스마엘과 이스마엘에 대한 신의 축복까지 분에 넘치는 축복을 받은 바 있으나여기서는그 이스마엘 사건은 우리의 본 주제와 다른 영역에 있기 때문에 비껴간다.

 

어느 날 이른 아침 갑자기이삭은 아버지의 명()을 받고 일어나사흘 길(G. M. Landes, “Inanna’s Descent to the Nether World,” 1967, cf. C. Westermann, Genesis 12-36, 1985, p. 358.)이나 걸어서 모리아 산에 도착하게 된다나이 어린 아이(naḥar, child, 창 22:5)인데도 이삭은 손에 불과 칼을 든 그의 아버지와 함께 단 둘이서아버지가 지워준 번제용 나무를 짊어지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는 순수한 생각만 가지고이제는모리아 산 산정(山頂)으로 오르고 있었다마을도 성소도 옆에 없는 한적한 산에서즉 영문(營門城門聖殿 영역밖에서 예배를 드리기 위해 그(이삭)그에게는 저승사자와도 같은 독한 마음을 품고 있을아버지와 단 둘이서 함께 그리고 또 사흘 길이나 걸어 온 피곤한 몸이지만그러나이젠 으슥한 산길인 모리아 산 산길을 깊은 고뇌 속에서 오르고 있었던 것이다그 때가 낮이었는지 아니면 밤이었는지는 모르나그러나 이삭의 마음에는 아마도 그것은 전적으로 칠흑 같이 어두운 밤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이삭은
비록 나이는 어리다 하여도당시에 열병처럼 유행하고 있었던 아이 희생제(human sacrifice / child sacrifice, cf. R. de Vaux, Ancient Israel, 2 vols. 1961,1965, Pp. 441-446. 출 22:29; 레 18:21; 삿 11:34-40; 왕하 3:27 참조.)라는 나쁜 종교관습에 대해서는 이미 잘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얼마간의 침묵의 시간이 지났다이삭이 입을 열고 아버지에게 여쭌다. “아버지불과 장작은 여기 있습니다마는 번제로 바칠 어린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아버지 아브라함은 대답한다. “내 아들아번제로 바칠 어린 양은 하나님께서 친히 살피고 계실 [친히 준비하실/손수 마련하실것이다.” 이 짧은 대화 사이그리고 그 후목적지까지 두 사람이 침묵 속에서 함께 걷는 동안의(창 22:8c) 그 공백 기간은 우리 인간의 문학적 필법으로서는 결코 다 묘사해낼 수는 없는 기막힌 상황이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목적지에 도착하자아버지 아브라함은그러나한 마디의 말은커녕 기침 소리도 한 번 내지 않고 신속한 몸놀림으로 제단을 쌓고제단 위에 장작을 벌여 놓은 다음, [곧장자기 자식 이삭을 묶어서(봐이야아코드, wayya‘aqōḏ 창 22:9d) 제단 장작 위에 올려놓았다.”(창 22:9) 아버지 아브라함의 이러한 동작이 숨 가쁘게 진행되는 동안아들이삭은 털끝만큼의 저항이나 항변의 말을 하지 않았다아버지의 뜻을 수용하고 순응한다는 의미다울지도 흐느끼지도 않았다이 아들을 보라먼 후일 우리 가운데 오실 하나님의 외아들예수를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방식으로만 성서를 통하여 우리에게 예시(豫示)하셨던 것이다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이 이삭이야 말로 메시아 예수의 진정한 예표’(prefiguration)가 아니고 달리 무엇이랴!


예수와 이삭 사이의 이러한 동형
(同型유비(類比; typological analogy)그 무엇보다그분들의 신앙적 승리가 일어난 곳이 모두! ‘영문 밖이라는 점(!)에서 그 일치점을 찾을 수 있다놀랍지 아니한가?


예언자들
(구약 예언자들)의 피맺힌 호소들이 웅변하고 있듯이. <성전/성소 중심주의>라는 형식주의 신앙은 오히려 하나님과의 만남 즉 하나님의 뜻과의 만남을 저해하는 바리새주의적인 신념이라고 할 수 있다예언자들은 이렇게 외쳤다. “너희는 벧엘(성소)을 찾지 말며길갈(성소)로 들어가지 말고 브엘세바(성소)로도 나아가지 말라!”(암 5:4; 4:4)라고 하기도 하고 너희가 나에게로 나아오지만누가 너희에게 그것을 요구하였느냐? [너희는나의 [성전마당 밟을 뿐이다!”(사 1:12)라고 외치기도 하며심지어는, “이것이 야훼의 성전이다이것이 야훼의 성전이다이것이 야훼의 성전이다!(三重 외침라고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렘 7:4)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성전]이 너희 눈에는 도둑의 소굴(굴혈[掘穴])로 보이느냐?”(렘 7:11)라고 하기도 하였다이 마지막 인용구인 예레미야 예언자의 외침은 우리 주님 예수께서도 목숨 걸고 인용(引用), 선포하신 말씀이기도 하다.(마 21:13; 막 11:17; 눅 19:46)


우리 주님 예수께서 그의 선교
(宣敎공생애(公生涯)를 단지 3년 밖에! 못 사셨다는 것이른 바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의 예언자적 활동과 가르침[성서교육]을 3년 이상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마침내는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는 것은 <세상은 철저히 어둠이고 예수님은 철저히 빛이기 때문>이었다는 말로 설명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설명은 있을 수가 없다 하겠다그러므로 <그의 대속(代贖)의 죽음과 새 창조(創造)로서의 부활>은 그를 죽여야 할 이단(異端)’으로 내어 몬 유대교의 그 성전 안에서는 일어날 수 없었다는 것은 당연하다오늘의 교회는 어떠한가반복되는 종교의식과 종교행사만 요란하게 반복해서 되풀이하고만 있는 오늘의 교회는 어떠한가?


그러나 
<영문 밖> 즉 모리아 산()’과 골고다’ 언덕은 모두 <성전 밖 또는 교회 밖>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우리 온 인류를 위하여 대속(代贖)의 피를 흘리시며죽으시고 또 우리를 영원히 살리실 확실한 한 표징으로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곳>, 그곳은 어디까지나 <성전 제의(祭儀>이었다. ‘교회’/‘성소는 단지 인류구원에 관한 복음을 선포하는 <하나님 선교>의 전진기지즉 아방가르드(avantgarde)일 뿐이지 천국 문을 여닫는 그런 권세(=열쇠)를 가진 곳(마 16:19)은 결코 아니다그럼에도 사람들은 그렇게 착각한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도다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리고 …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내 백성이 음행과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에 마음이 빼앗기고 음란한 마음에 미혹되었느니라.”(호 4:6, 12-12). 그러므로 마태 16:19에 대한 문자주의적인 신앙은 결코 바른 신앙이 아니!!라고 하겠다오히려 우리의 교회로 하여금 영원히 희망 없는 종교 단체로 전락하게 만들 뿐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먼저 회개하여야 한다세상의 소금과 빛인 기독교 공동체가 먼저 회개하고 파멸 직전에 있는 한국사회를 구하기 위한 회개(悔改)와 자성’(自省)하기를 먼저(!!) 하여야 한다늘 반복되는 예배의전만 되풀이하고 있는 그것이 이 사회를 위하여 무슨 소금이고 이 되겠는가두렵고 떨릴 뿐이다우선회개부터 하자!


오늘의 한국 상황은 아브라함의 결단과 이삭의 결단이 있어야 할 시점에 처하여 있다
생산성 없는 이념투쟁생산성 없는 권력투쟁생산성 없는 지방색 고집앞이 캄캄하다왜 우리는 살고자 하지는 않고 결사적으로 죽고자만 애쓰는가?(암 5:14; 겔 18:31-32) 왜 우리들 [반석 위에 세워진 교회는인류구원의 길을 가로막는 사탄-베드로’(마 16:23 -24)가 되려고만 애쓰는가?


영문’ 에서(‘ 에클레시아’=교회 에서인간구원의 길(말씀)이 선포되면교회는 그저 그냥 거기에 머물러 있지만 말고! ‘영문’ 밖으로(‘디아스포라’ 즉 세상 속으로 흩어지는 교회가 되어나아가야 할 것이다영광의 변화 산에서 초막 셋을 짓고‘(막 9:5; 눅 9:32) 거기 산 위에서 우리끼리‘(divide and rule하며?) 살려고만 하지 말고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는(막 9:17-18; 눅 9;37-39) 산 아래의 사회 속으로’(마 17:9,15; 막 9:9; 눅 9: 37) 내려와야만 하였듯이우리는 결단코 변화 산(마태 17:4) 위에만 있겠다고 하여서는 안 된다그러나 오늘의 지상교회들은 앞 다투어 교회 안에만! 머물기를 바라고 교인 수만수직적으로든 수평적으로든 늘리려고만 애쓴다나는 자신 있게 말한다. <성전이다성전이다성전이다!>(7:4) 라고만 외치다가 성전과 함께 망한 선민(選民예루살렘 시민들처럼우리도 그런 운명에 처해지지 않도록 우리 다함께 주님께 진심으로 회개기도부터 드려야 할 것이다. <영문 안에서죽지 말고 <영문 밖에서이삭처럼예수처럼부활하도록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우리 본문은 이 진리를 선포하고 있다.


이삭
-예수 동형이론모리아-골고다 동형이론은 이처럼 <죽지 않고 사는 길>에 관한 복음 선교의 최선의 한 방식이다.


신약 히브리서 기자가 말한 바
, <영문 밖의 그(주 예수)에게로 나아가자!>라는 외침(히 13:13)그러므로우리네 신앙공동체에게 <죽음으로부터 삶에로나아가자는 피맺힌 호소로서진정한 구원의 메시지(복음)라고 할 수 있다교회는 에클레시아’(=모이는 교회)일뿐만 아니라 동시에! 디아스포라’(Diaspora=the Dispersion, 흩어지는 교회)이기 때문이다이런 용어(‘흩어지는 교회라는 용어)를 들으면그만그 용어의 전후 문맥을 살피지도 않고 또 더 이상 깊이 생각해보지도 않은 채그냥 뒤로 넘어져버리는 순진하신 분들도 계시기 때문에(!), 이 복음 전하기가 참으로 조심스럽다민족이 이토록 위기 속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이 민족의 살 길을 위해 무엇이 생명의 길인지 그 길을 제시하는 책임을 우리가우리네 교회가 감당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이삭-예수’ 동형이론 그리고 모리아-골고다’ 동형이론(同型理論, typology)이 우리 시대를 그리고 우리 사회를 향하여 주는 메시지는 그렇다면 과연 무엇일까우선은 죽기보다 힘 든다는 그 회개를 먼저 하는 것이다자기 부정의 회개 말이다아버지의 뜻에 대한 절대 복종 말이다이삭의 침묵(창 22:8 -10)과 예수의 고통스런 기도(마 26:39)에서와 같은 아버지 뜻에 대한 절대복종 말이다그러나 교회는무엇 때문이지 전혀 진심으로’ 회개하지를 않으려 한다오히려 어깃장을 놓으며 믿음으로만’(sola fide), ‘은총으로만’(sola gratia)이라는 종교개혁 구호만 곡해(曲解)하여 외친다마치 중세 로마 교황청이 천국 입장권을 금화 한 푼만 받고 마구 팔듯이 면죄부 발행하기에만 급급하다아무리 가르쳐도 듣지 않는다우리 죄를 다 어떻게 감당하려고 이러는가?


그러나 회개하면 
이 보인다. ‘살 길이 보인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taḥaṯ benô ; instead of his son, 창 22:13d) 번제로 드렸더라.”(창 22:13)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야훼 예라에’(“야훼께서 나타나실 것이다”)라고 하였다.”(창 22:14a) 그 때야 야훼께서 자신을 우리에게(아브라함과 이삭에게나타내 보이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