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제목 운명과 자유- 이삭의 아내 리브가가 받은 신탁(神託)에 대하여 -창 25:21-26 김이곤 2012-06-222021-10-20 14:53

운명과 자유

이삭의 아내 리브가가 받은 신탁(神託)에 대하여 -

창 25:21-26

 

이삭의 아내 리브가는 이삭의 어머니 사라처럼아기 못 낳는 여인석녀(石女)였다후일 야곱의 아내가 된 라헬도 또한 석녀였다.(창 30:1) 이러한 현상은그러나성서의 증언에 의하면그 어떤 악마가 그렇게 한 것도 아니요 또한 우연히 그렇게 된 것도 또한 아니라 단지 하나님이 그렇게 하셔서(!) 그렇게 된 것이라는 것이 성서의 기본 입장이다.(창 30:2) 이러한 입장에는 신학적 변증(辨證)이 따라야하지만우리 가운데 이루어진 하나님의 구원역사(救援歷史)여하간늘 이러한 고난’(苦難)의 갈등’ 즉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갈등(the conflict that is already decisively shaped by God; cf. John 15:18-19)을 통하여! 이루어져 왔다그러므로 구약의 구원역사 신학은 <고난신학(苦難神學)>이다거의 예외가 없다!


따라서
, ‘자유’(freedom)가 운명’(destiny)을 타개한다고 보는 우리의 신념(cf. Paul Tillich, Systematic Theology. vol. I[1951], 182-186; vol. II[1957], 62-66)은 우리의 경험 현실에서는 부단히 도전과 저항을 받아 왔다오히려우리는 운명이 주도권을 가지고 자유를 신비롭게 운영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죽게도 하고 살게도 하시며상하게도 하고 낫게도 하시기 때문이다.(신 32:39; 삼상 2:6)


그러나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왜냐하면 이러한 운명에 걸려든 석녀인 이 구제불가능의 아내를 위하여 그 아내가 감히(!) 아이를 갖도록 해달라는 기도를 이삭이 하나님께 기도드리자야훼께서는 저 운명의 여인 리브가로 하여금 쌍둥이를 잉태하게 하셨다.(창 25:21d)!!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하여상황은 신학적으로 매우 풀기 어려운 국면에 접어든 셈이다.


이러한 국면 속에서
, ‘리브가는 다음과 같은 매우 특별한 신탁(神託; oracle)을 받는다. “ 민족이 너의 태 안에 들어 있다./ 너의 태 안에서  백성이 나뉠 것이다./ 한 백성이 다른 백성보다 강할 것이다./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다.”(창 25:23) 말하자면동생 야곱이 형() ‘에서를 제치고 약속의 아들이 되고 선민’(選民)의 조상이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이른 바이 말씀은 매우 해명하기 어려운 예정론’ 교리에 관한 문제를 포함하여 선택론’ 문제라든지, ‘운명론’ 문제라든지, ‘인간의 자유의지’ 문제라든지, ‘하나님의 주권’ 문제라든지등등의 난해(難解)한 신학적 문제들과 얽혀지게 된다.

 

<그렇다면, ‘야곱이 에서를 제치고 약속의 아들’ 또는 ()의 선민(選民)이 된 것은 운명적인 것인가아니면 야곱의 자유의지(공적/노력때문인 것인가그것도 아니면 그 어떤 다른 요소 때문인가?>

 

우리의 미래는그렇다면우리의 능력이나 우리의 의지나 우리의 주장에 의하여 만들어갈 수 있는 것인가아니면만들어갈 수 없는 것인가성서는 이러한 물음에 대하여 하나님은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다!”(마 3:9)라고 말한다그렇다면하나님의 말씀(약속)이란 요지부동의 철칙으로서하나님 자신도 이 원칙은 어떻게 할 수 없는 그런 절대적인 것그러므로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은 운명’(‘숙명’)적인 것인가그러나 자기 아내를 위한 이삭의 기도와 이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창 25:21)은 그런 단정을 속단이라고 보게 한다그러므로 운명과 자유자유와 운명의 대극 관계(polarity, cf. Paul Tillich의 조직신학)는 진지한 성서해석학적 토의를 요구하게 된다.


이 토의주제에 대한 
<최선의 대답>우리의 본문에 의하면야곱의 아버지 이삭이 그의 아내 리브가를 위하여 그의 하나님께 기도할 때그 때야곱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만드신 운명>(the destiny that is already decisively shaped by God)이라는 문맥에서 비로소 찾을 수 있게 된다하나님께서 만드신 운명! 실로야곱의 미래의 삶그 파괴적이고도 험악한”(창 47:9) 삶은 하나님의 말씀(=리브가 신탁[神託])에 의하여 이미 결정/선포된 것이라는 말이다물론이 하나님이 결정하신 그 운명은 또한 결코 인간(야곱)의 자유를 부정하지는 않는다그러나 그 자유는 하나님께서 이미 야곱을 위하여 마련하신 그 선택들로 둘러싸여 있는 자유이다마치 다음과 같은 의 탄식을 듣는 것과 같다하나님에게 둘러싸여 길이 아득한 사람에게 어찌하여 [하나님은빛을 주셨는고?”(개역 개정)/ 어찌하여 하나님은 길 잃은 사람을 붙잡아 놓으시고사방으로 그 길을 [하나님은막으시는가?”(욥 3:23)


여기서 주목할 점은
리브가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창 25:30; 리브가 신탁)의 중심내용은 <운명전환>에 관한 말씀이라는 점이다즉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마 19:30; 20:16; 막 9:35; 10:31; 눅 13:30), 이른 바(운명전환의 복음증언을 예견(豫見)하게 한다는 점이다.


성서비평학의 문맥에서는
이러한 리브가 신탁과 같은 기사(記事)들을 가리켜서흔히, <후대의 사건을 통하여 고대의 사건을 예견’(豫見)의 형식으로 설명하는 특이한 예언 문학>(vaticinium ex eventu)이라고 부른다이 신탁(神託; oracle)의 본질은 역사적 거리가 큰 두 시기를 하나로 결합시키는 일종의 시적 기교’(詩的 技巧; poetic craft)로서 이해된다그러므로 신학적 해석학의 차원에서는 이러한 시간적 거리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게 된다그럼에도 교회의 강단은 이러한 성서 문학적 표현들을 잘 설명해주는 친절(노력)을 외면하다보니성서의 진리가 엉뚱하게 왜곡되고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모순을 일으키게 되며 그러다 보니 [개신교]교회들은 개혁 이전의 중세 로마 가톨릭이 범한 자기모순보다 더 큰 자기모순에 빠지게 된 것이다이런 교회가 세상의 소금이 되고 빛이 되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하였던 것이다시간이 지날수록 교회의 참 모습의 등장은 더욱더 어려워지는 것은 당연하고마침내 하나님의 개입(심판의 종말 사건)이 불가피해지는 것이다.


신학적 해석학은 이러한 우주적 혼돈
(카오스, chaos)을 헤쳐 나가는 유일한 출구(出口)이기도 하다 하겠다그래서 <하나님께서 결정/선택하신 운명>에 따라야곱은 그의 자유’(freedom) 의지(意志)를 가지고 그의 길을그의 그 험악한(창 47:9) 길을 감내(堪耐)하면서 걷고 있는 것이다바로 이것이 야곱이 승리한 그 길이기도 하였던 바로 그 길이다예언자 호세아는 이러한 감추어진 신의 역사 섭리를 예리한 예언자적 눈을 가지고 탁월하게 이해하고 해석해낸다즉 그는 이렇게 말한다. “야곱이 모태에 있을 때에는 형과 싸웠으며다 큰 다음에는 하나님과 대결하여 싸웠다야곱은 하나님과 싸워서 이기고 울면서 은총을 간구하였다.”(호 12:3-4[히브리 본문은 4-5]; 창 32:28[히브리 본문29이하 [ ]안의 절수는 히브리 본문의 절수임]호 12:4[5]에서 말하는 이기다라는 말의 히브리어 원어는 ykl인데이 말의 뜻은 endure, be able to, can, be superior, win 등등의 뜻을 가진다호세아서에서는 야곱이 함께 씨름한 자를 ‘’하나님으로부터 천사로 바꾸었다. 히브리어 ykl은 여기 창 32장과 호 12장에서는 모두 endure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고 엘로힘은 본래는 gods, 즉 강의 ’ ‘divine beings’등을 의미하였으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그 엘로힘이 야훼 하나님과 연결되자 곧 천사’[ἄγγελος]로 전이[轉移]된 것으로 보인다.)


이상의 관점에서 볼 때
야곱 출생에 관한 이 기사(記事)는 야곱의 생애가 하나님이 야곱을 위하여 선택하신 운명과 그리고 야곱 자신의 자유’ 사이에 진행된 대극(對極관계의 긴장을 극명하게 보여 준 한 매우 모범적인 예[範例]가 된다고 하겠다즉 야곱 생애의 실질적인 시작과 끝은 야곱이 리브가의 복중에 있을 때 리브가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리브가 신탁기사(神託記事)’>로부터 시작(창 25:21-26)하여 이중(二重)의 야곱이스라엘 개명기사(改名記事)’(창 32:28 [29]; 창 35:10)로 이 난다는 사실에서 그 모범됨을 볼 수 있다고 하겠다그리고 이 시작과  사이에 들어있는 야곱의 생애(inclusio)는 험악한 세월’(창 47:9)이었음이 분명하고 그 내용은 또한 거듭되는 운명 전이(轉移)의 파도치기였음이 분명하다고 하겠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운명이란위에서 언급한 야곱 출생에 관한 우리의 본문(창 25:21-26)과 그리고 야곱 이야기 전체(창 25B-35)에 대한 신학적/해석학적인 관점에서 보면하나님께서 부여해주신 운명은 결단코 하나님과 인간(야곱)이 모두 굴복하여야 하는 그 어떤 숙명적인-절대 원리는 아니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즉 운명과 자유가 파도치기를 하되그러나 그 파도치기 운동은 언제나 철저히 운명전이’(運命轉移)의 방식으로()!! 거듭되어 왔다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랍다예컨대야곱 이야기 다음에 이어지는 요셉 이야기’(창 37-50)와 모세 이야기’()가 또한 바로 그러하다.


그렇다
야곱 출생에 관한 <리브가 신탁(神託)>은 분명 현실적 상황의 뒤집힘’ [convertible, 顚倒]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이 사실은 모든 자유가 거기에 절대적으로 굴복해야 하는 그런 경직된 숙명이라는 것이 있지는 않다는 것을 말한다고 하겠다아브라함-이삭-야곱으로 이어지는 족장시대에 있어서는 장자가 으뜸이 되고 첫째가 되어야하며 가장 많은 사랑과 축복을 받아야 하는 천부적인 권리를 갖고 있다는 신앙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그러나 하나님은 여기서(이 리브가 신탁에서이러한 질서를 완전히 뒤집어엎으시는 것이다말하자면 하나님은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를 먼저 되게(마 19:30; 20:16; 막 9:35; 10:31; 눅 13:30) 하실 수 있으신 분이시라는 것이다사도 바울도 절실하게 깨달았던 것처럼하나님은 세상에서 비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을 택하셨으니 곧 잘났다고 하는 것들을 없애시려고 아무 것도 아닌 것들을 택하셨습니다.”(고전 1:28)라고 증언한 바가 있다구약성서에서는 자주매우 자주, <나그네고아과부>를 통하여그리고 신약성서에서도 또한 역시 매우 자주 <세리와 창기>를 통하여 <운명전이>의 구원을 수행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는 것은 이 때문이다하나님이 선택하시고 부여하시는 운명은 그러므로 경직된 불변의 철칙이 아니라 그의 운명전이(運命轉移)의 구원역사를 통하여/파도치기 운동을 통하여 자유를 자유 되게 하는 구원행위인 것이다.


하나님의 선택하시고 부여하시는 
운명은 자유를 자유 되게 하는 구원역사적인 행위인 것이다그 하나님을 구약성서는 긍휼의 신’(‘엘 라훔’/ 출 34:6)이라고 하였고 신악성서는 그 하나님을 사랑이라고 하였다(요한 1서 4:8,16; cf. 요 3:16). ‘긍휼이라는 히브리말은 산모의 자궁이라는 말에서 유래한 말이다그 사랑과 그 긍휼은 자궁의 진통을 통하여
구원의 영광과 기쁨을 창출해내는 성격의 것이다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여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선택하시는 운명은 자유를 자유하게 하는 구원사건이다하나님이 선택하시고 부여해주시는 그 운명은 운명전환의 파도치기를 통하여 우리를 기어이(!) 구원해내시는 고난신학적인’ 구원사건 일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