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제목 하나님 앞에서의 ‘축복’ - 창 27장 김이곤 2012-07-072021-10-20 14:54

형을 밀치고 들어와서그것도 반인륜적인 속임수를 사용하여연로하신 아버지(‘이삭’)가 신의 이름으로 장자 에서에게 내리려한 축복’(‘베라카’)을 가로챈 둘째 아들 야곱의 그 속이는 행위와 그리고 그 속이고 속임 당하는 과정 속에서 아버지와 두 아들 사이에 주고받은 전체 대화(창 27:1-38) 가운데 나타난 그 축복(‘베라카’)이라는 말의 개념을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하는 것이 이번 장()에서 다룰 기본 주제이다.


물론
축복을 빼앗긴 자의 억울함을 아뢰는 장자 에서의 호소에 대한 아버지 이삭의 단호하고 냉정한 다음과 같은 대답즉 네가 살 곳은 땅이 기름지지 않고 하늘에서 이슬도 내리지 않는 곳이다./ 너는 칼을 의지하고 살 것이며 너의 아우를 섬길 것이다./ 그러나 만일 네가 애써 힘을 기르면 그가 네 목에 씌운 멍에를 네 스스로 부술 수도 있을 것이다.”(창 27:39-40)라는 대답은지난 번 칼럼(칼럼 24: ‘운명과 자유’)에서 이미 언급한 바, <운명과 자유>의 관계문제가 또 한 번 더 동일한 의미로 분명하게 설명되고 있다즉 운명은 자유를 이끌지만 자유를 전적으로 폐기하지는 않는다그러나 이 장()에서서의 쟁점은 이러한 문맥 속에 등장한 매우 의외(意外)의 이 축복’(‘베라카’)이라는 말이 갖는 그 신학적 의미가 무엇이냐하는 것에 있기 때문에여기서는 주로하나님 앞에서의 축복이라는 말의 그 신학적 의미 규명에 주로 초점을 맞추려 한다.

......................................................................................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축복’(‘베라카’)이라는 말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하여서는우선 우리는시편 1편과 그 외의 여러 곳에서 말하는 ’/‘행복’(‘아쉬레 happiness 시 128편과 144편 참조)이라는 말과는 이 축복’(‘베라카’ blessing)이라는 말이 어떻게 다른지를 먼저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그 무엇보다시편 1편 등등에서 말하는 ’/‘행복이라는 말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더 강조점을 두어 사용하는 말인데 비()하여 축복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친히 선수(initiative)를 써서 부여하시는 그 선수행위에 더 강조점을 두고 사용하는 말이라는 것이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물론, ‘축복이나 행복이나 간에 모두가 다 마지막에 와서는 인간의 자유의지 행위의 결과로서 이루어지는 결과물이지만그 강조점은 현저하게 구별된다는 것이 성서가 강조하는 점이다즉 /행복’(‘아쉬레’; ‘마카리오스’)은 인간의 자유의지 행위에 대한 신의 보상적 성격을 강조하지만그러나 축복’(‘베라카’; ‘율로게토스’)은 하나님이 부여하시는 그 선수행위를 강조한다물론 둘 다의 그 구성내용은모두 히브리적인 사유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주로 을 물질적 보상과 번영으로 보고는 있지만그 결국은 모두 신의 구원행위로 귀결된다.


그러나 이 장
()에서 우리가 다루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것으로서의 그 축복>의 의미규명에 있다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선수를 사용하여 부여하신 그 축복>

 

항구적이고 절대적인 (sovereign power)을 갖고 있다는 점과 [동시에]

거센 파도치기를 통해서가는 운명전환의 기복(起伏)이라는 성격을 갖고 있다는 점

 

에서주로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보상으로서 받게 되는 그 [행복]’이라는 말과는 그 성격상 뚜렷하게 구별되기 때문이다그러므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소서.”라는 말에는 이러한 의미를 담고 있어서따라서  받으소서.”라는 통상적인 말과는 매우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하겠다즉 하나님께서 이삭[先祖]의 입을 통하여 두 아들야곱과 에서에게 선포한 축복성서의 문맥에서 보면그것은 분명 축복’(blessing)이지 ’(happiness)은 아닌 것이다따라서 목사나 사제가 예배 끝 부분에서 행하는 축도는 ’(happiness)의 선포가 아니라 축복’(blessing)의 선포라는 사실을 얼마나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는지는 매우 궁금하다.


축복이라는 말은그러므로어디까지나 하나님의 구원사적 의지를 강하게 담고 있는 말이라고 하겠다즉 하나님은 어떻게 하여서라도 인류를 구원하시려 하시며 복 주려 하시는 구원의 신이요 긍휼과 사랑의 신, ‘엘 라훔’(출 34:6)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이 증언이야 말로 복음인 것이다.


그러나 성서의 문맥에서 보면
특이하게도하나님께서 누군가를 선택하여 축복하셨다는 것은마치 운명이라는 말과 결부시킬 수 있을 정도로절대적인 통치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고 그리고 참으로 끈질기게그 선택하신 자와의 연결 관계를 결코 단념하시지 않기 때문에 결국에는 그 축복은 구원에로 성취되는 특징이 있다는 것이다이 사실은 구약성서에 기술되어 있는 여러 구원사적 드라마들과 하나님의 종의 노래’(특히 고난 받는 야훼의 종의 노래’)들을 통하여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고 그리고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의 수난(受難)이라는 사건에서는 그 성취가 절정에 이르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이 모든 구원사적 사건들을 우리의 본문은 감히 하나님의 축복사건(!)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야곱과 에서’, 그 두 아들에 대하여 아버지 이삭이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 행한 그 축복의 사건, ‘운명적인 구속력을 가지고 끈질기게 두 아들의 삶에 절대적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그래서 에서가 살 땅은 척박한 땅일 뿐이다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셔서 그렇게 된 것일 뿐이다불평한다고 해서 척박한 땅이 주는 고난이 당장 해소되는 것이 아닌 것은 그 때문인 것이다뿐만 아니라 야곱이 살 땅도비록 교활하게 속이는 자의 땅이라 할지라도!, 그 풍요로운 땅이 곧 척박해지지는 않는다즉 축복의 위력은 부모의 힘[부모의 기도가 가진 힘]도 넘어선다거의!! 운명적이고 숙명적이라고 할만하다.


[내 아들아네가 받을 저주는 어미인 내가 대신 받으마.”(창 27:13)라고 어머니 리브가가 아들 야곱에게 한 말 참조그리고 에서에게 아버지 이삭이 남김 말내 아들아내가 그를 너의 주()로 세우고 그의 모든 친척들을 그에게 종으로 주었으며 곡식과 새 포도주가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도록 하였으니이제 내가 너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창 27:37)라는 말도 참조하라.]


그러나 창 
27:40b가 말하는 대로이 거대하고 절대적인 힘이른 바운명과도 같은 저 거대 세력도 다음과 같은 아들 에서에게 준 아버지 이삭의 말즉 만일 네가 애써 힘을 기르면너는그가 네 목에 씌운 멍에[=운명의 멍에]를 부술 수도 있을 것이다.”라는 말씀 앞에서는 기이하게도 그 운명적인 말이 상대화된다말하자면, <운명과 자유>는 대극’(對極)의 긴장 속에 있기는 하지만또한 자유가 아니라 운명이 모든 것을 주도하기는 하지만(즉 자유가 운명을 좌우하지 못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운명이 자유를 무력/폐기시키지는 않는다이것이 신의 축복이 갖고 있는 고유한 성격이며 그리고 그 고유성은 그것이 지닌 구원사적 성격을 통해서 우리가 불가역적(不可逆的)으로 인지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신의 축복’(blessing)은 인간이 그의 자유의지만으로서 얻게 되는 ’(happi- ness)과는 그 성격이 엄격히 구별되는데왜냐하면 신의 축복(blessing)은 반드시 운명전이의 역사(運命轉移의 歷史=救援史的 傳承 歷史)라는 힘겨운 파도타기를 반드시 전제한다는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아들 야곱에게 어머니 리브가가 네가 받을 저주는 내가 받으마.”(창 27:13)라고 하면서까지 장자의 배타적 특권에 감히 맞서서/항거하여 일어나고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인 것이다.


하나님은
실로인간을 축복하시는 분이시다이 축복의 의미는 야훼의 이름을 빌려서 인간이 행하는 축도’(祝禱)와 축사’(祝辭)에서도 즉 모든 종류의 <하나님 앞에서의 축복>(창 27:7)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의도를 가지시고(‘구원의 의지를 가지시고베푸시는 이 축복’(blessing), ‘운명전이’(運命轉移)의 파고(波高높고 험악한(창 47:9) 세월(passing on)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구원사적 섭리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그러므로그것을 받는 자에게는 그것 때문에 특별한 믿음이 필요(!!)하게 된다왜냐하면 이 축복의 성취과정 속에는 행복을 파괴하고 그 행복에 역행하는 과정즉 일종의 인간으로서는 이겨내기 힘든 혹독한 신의 시험’(test)이라는 과정이 반드시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던 경우와도 상응 일치하는 것이다.

 

최소한 매주 1회 이상은 야훼 하나님 앞에서’(=하나님의 이름으로 또는 삼위일체 하나님 의 이름으로축복을 받으시는 이 땅의 모든 평신도들!!!에게는그러므로그 축복을 받을 수 있을만한 믿음이 필요하다는 말이라고 하겠다왜냐하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베 풀어지는 축복은 그 축복의 성취과정에서 겪게 될 혹독한 신의 시험’(test of God)을 믿음으로 이겨내어야만 비로소 성취되는 것이기 때문이다그러므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 은 자에게는 모름지기 아브라함과 야곱이그리고 요셉과 모세가 가졌던 그런 믿음이 필 요하다고 하겠다왜냐하면 그 하나님 앞에서의 축복에는 반드시 시련극복을 전제한 야훼 하나님의 구원사적 섭리가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즉 야훼 하나님 앞에서 공적으로[祭儀的]으로 늘 축복(blessing)을 받는 우리 신앙인들은저들처럼즉 혹독한 신의 시험을 이겨내고 극복한 저들처럼즉 모리아 산에서의 아브라함처럼(창 22), 얍복 강에서의 야곱처럼(창 32호 12:4[5]), 요셉의 집[總理 官舍]에서의 요셉처럼(창 45:4-15; 50:15-21), 미디안에서 이집트로 나아가는 광야길어느 야숙 숙소(野宿 宿所)에서 모세 혹은 그의 아들을 죽이려 하신 야훼 하나님의 길을 두 팔로 가로막고 나서서 그와 대결한 모세의 아내 십보라처럼(출 4:24-26), 그리고 거듭거듭 반역하고 배신하는 음란한 선민(選民이스라엘을 죽음의 광야로 꾀어내어 pāṯāh호 2:14[16]> 40여년 세월동안이나 혹독하게 채찍질하시는 야훼 하나님의 징계행위를 보면서 오히려 그 하나님의 징계행위(‘가시와 담’ 호 2:6[8]) 안에서 멸망할 선민(選民이스라엘로 하여금 참 이스라엘로 만들어 내시려 하시는 야훼 하나님의 그 참 사랑의 역설적(逆說的)인 구원교육 행위를 읽어낸 예언자 호세아처럼(호 2:6-7[8-9],14-15[16?17])!! 야훼 하나님의 심판행위특히야훼 하나님의 십자가 심판(저주신 21:22)행위를 통하여 오히려하나님의 구원행위와 부활의 구원섭리를 읽어낼 수 있는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 신앙이
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신앙이며이 신앙이야말로 마지막 심판을 이겨내는 진정한 승리의 신앙이라고 하겠다이러한 신앙의 참 깊이를 체득한 신앙인이야말로 기독교의 왜곡된 물량주의적인(바알주의적인거짓 신앙을 극복할 수 있는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하겠다이러한 신앙인이야말로 종교개혁 이래로 개신교가 범해 온 반(기독교적(교회적(성서적 신앙을 바로 잡을 수 있는 참 신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