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제목천지를 지으신 지고(至高)의 신(神), 야훼 - 창세기 14:17-24 김이곤 2011-11-062021-10-20 14:50
작성자 Level 10

아브라함이 믿었던 신(神), 즉 이스라엘의 선조들이 믿었던 신(神), 마침내는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새롭게 소개되고 이해된 그 신(神)은 누구이신가?


이 물음은 이스라엘 종교사(宗敎史) 연구에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주제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과제는 우리 기독교 신자들의 하나님 이해를 바르게 정립하는데 있어서도 결정적으로 중요한 과제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여기서 신(神)에 대한 신앙고백을, 특히 종교의전적인 문형을 사용하되 신학적으로 매우 정련(精鍊)된 신앙고백 문형으로 서술(敍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 우리의 본문은 아브라함이 소돔 왕과 그리고 살렘(
옛 예루살렘=가나안의 ‘여부스’ 땅)의 제사장(‘엘’을 섬기는 이방인 司祭)인 ‘멜기세덱’과 만난 사건, 즉 ‘신학적 해석이 꼭 필요한 한 사건’에 대한 매우 심도 있는 해석학적 보도로 구성되어 있음이 확실합니다.
 

창세기 본문 중에서 주석하기가 가장 난해(難解)한 장(章)으로 널리 알려진 이 창 14장 전체의 이야기는, 크게 나누어보면, 약 세 개 정도의 독립된 이야기가 편집자의 의도에 의하여 잘 조직된 하나의 큰 편집물로 구성되어 있음을 봅니다. 즉 아브라함이 외국 이주민으로서 거주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남방 헤브론의 마므레 땅에서 보면, 팔레스타인 동북지역에 운집해 있는 제국들(4+5개 帝國) 사이의 정치적 긴장관계가 전쟁으로 비화되어 침략과 약탈의 소요가 크게 소용돌이 쳤었던 한 전쟁에 관한 보도(1-11절)와 그 전쟁의 여파가 ‘소돔’ 땅에 살고 있는 ‘롯’에게까지 미쳐서 롯이 포로로 잡혀가게 되자, 아브라함이 나서서 자신의 집에서 길러온 종[私兵] 318명(Jewish Gematria [of Eliezer]? or a sizable army in the El-Amarna tablets?)을 데리고 밤을 틈타 탈취 자들을 추격하여가서 조카 롯과 빼앗긴 그 모든 것을 되찾아 오는 아브라함의 전쟁영웅(warrior)적인 모습(아브라함 설화 전체의 분위기와는 전혀 조화되지 않는 아브라함의 전혀 색다른 전사[戰士] 이미지)에 관한 보도(12-16절) 그리고 조카 롯을 구출한 아브라함이 개선(凱旋)하여 돌아오는 길에 ⓐ소돔 왕과 ⓑ살렘 제사장(이방인 제사장) ‘멜기세덱’의 영접을 받고 그들과 나눈 이야기(17-24절) 등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중점적으로 다루려고 하는 본문은 
세 번째③ 본문(17-24절)입니다. 즉 ‘믿음의 선조’요 전쟁용사인 아브라함이 자신의 개선(凱旋)을 영접하는 두 지도자, 즉 ⓐ소돔 왕(정치 지도자)과 ⓑ살렘 제사장(종교 지도자)을 만난 사건에 관한 보도가 갖고 있는 그 ‘신학적 의미’를 한 번 다루어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갖는 관심은 두 가지입니다.


그 하나(1)는
 이방인(가나안 ‘여부스’족의 땅) 제사장의 제의(祭儀) 의전적인(‘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오는) 영접에 대해서는 그 얻은 모든 것의 십분의 일[十一條]을 드리고 또 그 이방인 제사장이 자기가 섬기는 신(=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엘’)을 찬양한 그 ‘찬양’을 아브라함은 십일조 헌금의 형식으로 답례한 반면에, 세속 제왕의 영접에 대해서는 아브라함이 그 얻은 모든 것을 한 톨도 가지지 않고 다 내어 놓으면서 왕의 사은(謝恩)은 실오라기 하나도 또 신발 끈 하나도 손대지 않겠다고 선을 그으며 사양하였다는 증언이 갖는 그 의미는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른 더 중요한 하나(2)는 이방인의 제사장(가나안 여부스의 ‘엘’ 제사장)이 자기가 섬기는 신, 즉 ‘천지를 지으신 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 엘룐 코네 솨마임 봐아렛츠)인 그 신(神), 즉 히브리 말로 ‘엘 엘룐’이라고 부르는 그 신(神)을 믿음의 선조 아브라함이 전혀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심지어는 그 신(神, ) 옆에 나란히 ‘야훼’를 병렬시킴으로서 ‘야훼’와 ‘엘’을 동격화 시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는 것입니다. 즉 아브라함은 ‘이방신’을 함께 섬기는 ‘다신론 자’이거나 야훼 신을 모독하는 불경을 저지른 자이거나 하다고 말할 수 있다는 말일까요?


그러나 창 14장기자의 생각이 그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창 14장의 기록은 아브라함의 야훼 신앙이 매우 당당함을 증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cf. 창 14:23-24). 뿐만 아니라 이 창 14장과 곧바로 연결되는 창 15장의 소위 아브라함 계약기사에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야훼 하나님께서 ‘의’(‘義’)로 여기셨다”(창 15:6)고 선포함으로서 아브라함은 아, 저 위대한 작호 믿음의 선조’(The Father of Faith, C. Westermann, Genesis 12-36, Minneapolis, Augsburg Pub. House, 1985[독어 판은 1981], p. 222; cf. B. Vawter, On Genesis, New York: Doubleday & Co., 1977, Pp. 207-208 "the quintessential example and model of the man[sic] of faith"; G.J. Wenham, Genesis 1-15, Waco: Word Books, 1987, P. 329)라는 영광스러운 칭호를 얻게 되었음을 증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증언은 우리에게 과연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예컨대, 신학적 사고(思考)를 진솔하고도 확실하게 하는 한국의 어떤 대표적 개신교 목사님이 
만일 애국가를 부를 때 “하느님이 보우하사 …”라고 하는 가사 속에 나타난 조상전래의 그 통속적 ‘하느님’ 신앙을 전혀 거부감 없이 전적으로 수용하면서(!) 동시에 그 ‘하느님’을 “하나님이 보우하사 …”라고 신학적 재해석을 하며 애국가를 불렀다라고 할 때, 그리고 한국의 가톨릭교회가 개신교 성서에 나오는 ‘하나님’이라는 호칭을 ‘하느님’이라고 표기하고 또 그렇게 호칭할 때, 아마도 이 상황은 아브라함이 당시 셈 족 일반이 통상적으로 ‘신’(神)을 통칭하여 불렀던 그 ‘신’ ‘’과 이스라엘의 ‘신’ ‘엘로힘(출 3:6)과 ’출애굽 구원의 ‘신’ ‘야훼’(출 6:3)를 동일한 신(神)으로서 고백한 그 상황과 매우 동의 평행된다고 생각됩니다. 말하자면 셈 족 유랑민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중동지역을 유랑하면서 그의 파란만장한 삶 속에서 만나고 또 “불렀었던” 그 ‘신’(“예배하였었던”=“qr’하였었던” 그 신 cf. 창 4:26; 창 14:22[맹세]; 창 33:20[“-엘로헤-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다.”])이 어디까지나 셈 족의 사람들에게는 이었다는 사실(!!)과 이스라엘 12지파의 아비인 ‘야곱’이 그의 고통스러운 긴 순례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오자마자 지금까지 자신을 지켜주신 신(神) 엘’의 은총에 감사하여 제단을 쌓고는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엘로힘[하나님]이시다(“엘-엘로헤-이스라엘”) 즉 “하느님은 하나님이시다.”라고 고백하였다는 것(창 33:20)은 바로 이러한 신앙현실을 웅변적으로 반영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매우 놀라운 사실은, 먼 후일 이스라엘 12지파 공동체가 마침내 하나의 어엿한 ‘나라’로 설립될 때에도! 그 국호[國號]를 ’이스라-야[후]‘라고 하지 않고! 감히 ’이스라-‘! 이라고 하였다는 것은 놀라움 중의 놀라움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이 두 행위
(①소돔 왕의 사은[謝恩]은 단호히 사절하고 멜기세덱의 제의적[祭儀的] 축복은 기꺼이 받아들인 행위와 ②가나안의 ‘엘’과 이스라엘의 ‘야훼’를 동일 신이라고 고백한 행위)는, 그가 이스라엘의 믿음의 조상(창 15:6[E]; cf. 창 12:1- 3[J])이라는 전제에서 보면, 우리의 신(神) 신앙을 정립하는데 있어서 매우 계몽적이고 선도적(先導的)인 그리고 혁명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분명, 우리는 여기서부터 ‘구약성서-신약성서’가 일관되게! 증언하는 그 ‘신’의 ‘유일하고도 보편적인’(!!) 본질에 비로소 바르게 근접(近接)하기 시작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큰 놀라움입니다. 이 내용을 풀이한다면 대강 다음과 같이 풀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첫째(1)로는 ‘정교관계’(政敎關係)에서의 
사제(司祭)의 권위 문제에 관한 가르침이 이 본문 속에 들어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이 말은 구약문헌 중에서 가장 오래된 문헌들 중 하나로 널리 알려진 출 15:18의 말씀, “야훼께서 영원무궁토록 [왕으로] 다스리실 것입니다.”와 우리 본문 창 14:17-24 사이에는 비록 정확히 직접적인 평행전승이 이루어진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그런 개연성은 충분히 있음을 보여준다고 생각되며 따라서 이 둘 사이에는 동일한 신학적 맥이 이어진다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더욱이 이 아브라함의 십일조 헌납행위가 후일 다윗시대의 십일조 조세법(十一租 租稅法)의 법적 권위를 뒷받침하는 자료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면 그런 생각은 더욱 더 떨칠 수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분명,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여기서 소돔 왕의 권위는 평가절하하고, 비록 이방인 사제(司祭)라 할지라도, 멜기세덱 제사장의 ‘사제적인’(the Priest-King) 권위는 ‘진정한 왕권’(theocratic kingship)의 권위로서 인정하였음(‘다윗’의 사제적 활동 참조. cf. 삼하 6:13-18; 24:24:17; 시 110:4)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의 신정이념(神政理念)은 이렇게 하여 그 근원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로까지 소급하게 된 셈입니다.


멜기세덱은 또한, 우리 본문에 의하면, 사제(司祭)일뿐만 아니라 살렘 왕(창 14:18)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매우 후대의 해석 자료인 신약의 히브리서 7:2에서도 다음과 같은 말로 해석되었습니다. “[멜기세덱이라는] 그 이름을 해석하면 먼저는 의의 왕이요 그 다음은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느]님[θε??]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히 7:2b-3).”라고 해석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해석은 기독교의 신앙세계에 깊은 영향을 끼쳐 왔었습니다. 즉 ‘멜기’라는 히브리어는 ‘나의 왕’을 뜻하고 ‘세덱’이라는 히브리어는 ‘의(義)’를 뜻한다는 통상적 이해와 그리고 또 그를 ‘살렘 왕’이라고 할 때의 그 ‘살렘’(샬롬)이라는 히브리어의 의미는 또한 ‘평화’라는 의미를 갖는다는 통상적 이해에 근거한 해석이라고 하겠습니다. 진정한 제사장 ‘멜기세덱’은 ‘의’(義)와 ‘평화’(平和)의 왕이라는 말입니다. 그리하여 ‘멜기세덱’이라는 말의 좀 더 근원적인 원시-기원을 찾아가보면 비록 그것이 ‘나의 왕은 찌드크(zidk는 남부 아라비아와 페니키아의 신의 이름임)이시다.’를 의미한다고 하더라도, 창 14장 기자의 이러한 해석학적 적용은 오히려 후대 신약 히브리서 기자의 해석과 더 잘 조화된다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여기 창 14장에서 ‘멜기세덱’을 ‘왕이요 동시에 대제사장’(priest-king)으로 묘사한 그 전통의 원형(prototype)은 가나안의 그것(priest-king)에서 유추한 것이기 보다는 오히려! ①메시아적 다윗 전승에 의거하였을 가능성(cf. 시 110:1-4cf. H-J Kraus, Psalms 60-150, Minneapolis: Augsburg, 1989, Pp. 350-351)과 ② 신약의 히브리서 7:3이 고대 ‘텔-아마르나’(Tel-Amarna, 기원전 14C) 문서에 나타난 바, 여러 번 반복된 조문과 오히려 더 평행을 이루었을 것으로 볼 가능성이 있다는 점 등등에서 볼 때, 여기의 ‘멜기세덱’은 다윗 전통에서 계승한 바, 저 ‘메시아적-이상적 신정이념’(神政理念: Messianic Theocracy)의 모형이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즉 ‘왕’은 야훼 신의 인준(God's promise and sanction, 삼하 7장 참조!)에 의해서만 비로소 왕이 되었기 때문이며 따라서 이 전통은 출 15:18(cf. 삼하 7:16,26,29; 시 110:4)의 전통을 잇게 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게는 그러므로 지상(地上) 왕은 왕이기 보다는 야훼의 ‘기름부음 받은 종, 메시아’일 뿐이며 ‘신의 양자(養子)’로써, 여기에 맞서는 이방의 왕들(세상의 군왕과 관원들, cf. 시 2:1)을 모두 철장으로 깨뜨릴 분이시라고 하겠습니다(시 2편). 따라서 세속 ‘왕’은 신의 ‘사제’의 권위 아래에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소돔 왕과 멜기세덱 제사장에 대한 아브라함의 구별적인 이 태도는 이러한 전통의 ‘모범’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이념은 사실 현대의 기독교 신앙인에게 있어서도 내면화되어야 할 신앙이념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둘째로(2), 아브라함의 이 사건이 우리 신앙 정립에 있어서 보다 더 중요한 점은 ‘신앙의 조상인 아브라함’(
창 12:1; cf. 창 15:6)이 ‘이방인 사제 멜기세덱’의 신 ‘’(하느님, 셈계 세계에서는 일반화된 ‘神’의 통칭)을, 이 경우엔 가나안의 셈계 토속 민들의 신앙의 대상인 ‘엘’을, 이른 바,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는 애국가에 나타나는 ‘하느님’과 같은 분, 그 분을 자신이 믿고 있는 ‘야훼’(구약과 신약이 일관되게 ‘유일하신 신’으로서 믿는 神)와 동일한 신이시라고 감히! 고백하였다는 사실(창 14: 19,20,22)입니다. 비록 우리 한국인들은 이 구절들에 나타나는 ‘지극히 높으신 신’(히브리어 ‘엘 엘룐’)이라는 말을 한국어 번역 성서가 ‘’(하느님)과 ‘엘로힘’(하나님) 사이를 구별 않고 모두 ‘하나님’으로 번역하였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이 고백의 신학적 의미가 전혀 인지되지 않았다고는 하더라도, 이 본문들의 히브리어 원문이 말하려는 의미는, 그러나, 그렇게 슬쩍 넘어 지나가기에는 신학적으로 너무나도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여기에는 이른 바 이스라엘 예언역사의 초기(특히 기원전 8세기) 히브리 예언자적 정신(헤브라이즘)의 본질적이고도 탈 민족주의적이며 탈종교적인, 이른 바, 범 세계주의적인 혁명적 야훼 신앙이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야훼’는 ‘’이시며 이스라엘의 ‘조상들의 하느님’(출 3:6; 6:3)이시라는 것입니다. ‘야훼’(유대교)가 따로 있고 ‘알라’(이슬람교)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神)은 ‘천지를 지으신 엘(하느님)’ 그 분만이실 이라는 것입니다. 그 분, 바로 그 분(O, He!),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 그 분께서 모세를 그의 종으로 부르셔서 인류가 살 길(신 32:47)이 ‘토라’(‘하나님의 뜻) 안에 있음을 가르치신 것이고 또 아들 예수도 ’보내셔서‘(요 6:38,39; 8:26,29) 인류가 구원 받는 길(요 14:6)을 몸소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교 간의 전쟁(이스라엘 아랍 간의 전쟁)은 말할 것도 없고 종교 간의 경쟁이나 다툼까지도 또한 그것은 ’한 분 하느님‘에 대한 반역이요 모독일 뿐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은 우리 신앙을 바로 정립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실로, 구약성서가 ‘바알’은 영원히 격파할 원수 ‘아말렉’(
출 17:14-16, cf. 왕상 18:38-40)이라고는 끝끝내 주장하지만 그러나(!) ‘엘’(‘하느님’)과 ‘엘로힘’(‘하나님’)은 영원한 ‘동의평행 어’(同義平行 語; synonymous parallel)로 끝내 견지해 온 것은! 바로 이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신’은 오직 ‘한 분’이시며 우주는 이 ‘한 분’의 질서 안에 있으므로 그러므로 구약성서 안에 이 ‘한 분’을 수식하는 말들(predicates)은 많으나(cf. 엘 엘룐, 엘 샤따이, 엘 올람, 엘 로이, 앨 벧엘, 엘 야훼[?엘 야휘?] 등등) 그러나 ‘엘’(하느님)은 오직 한 분뿐이시고 ‘엘로힘’(하나님)도 ‘야훼’도 그 ‘엘’(하느님)이실 뿐인 것입니다.(2011.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