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제목 노아홍수의 ‘무지개 계약’ 교훈-창 6-9장 중심하여 김이곤 2011-06-092021-10-20 14:48
작성자 Level 10

‘노아홍수’를 비롯한 여러 대홍수(deluge)사건들에 관한 전승(傳承)은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 강을 끼고 있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중동세계에서는 매우 흔하게 발견되는 역사전승입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고대 바벨론 신화에 나오는 대표적 ‘홍수서사시’인 ‘길가메쉬 서사시’ (Gilgamesh Epic)는 구약성서의 노아 홍수 기록과 문학적 유사점이 많은 홍수기사로서 매우 널리 잘 알려진 홍수설화이고 그 이외에도 고대 메소포타미아 근역에서 전해지는 여러 홍수신화들도 노아 홍수 기사와는 많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노아 홍수 기사를 고대 중동의 어느 특정 ‘홍수신화’의 모방문학이라고만 보는 가설은(길가메쉬 서사시의 경우라 할지라도) 그렇게 쉽게 단정하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노아홍수에 관한 전승은 고대사회의 역사에서 일어나고 있었던(또한 우리의 역사 안에서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여러 자연 파괴적 대홍수 현상에 관한 역사전승(!)에 대하여 구약성서기자들(J&P)이 내린 신학적 해석인데, 이를 통하여 우리가 과연 여기서 어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느냐 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전적으로 중요하고 의미가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빛에서 볼 때, 노아 홍수기사와 길가메쉬 서사시 사이에는 신학적 차이가 뚜렷하게 나타나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길가메쉬 서사시에서는, 노아홍수 기사에서와는 달리, 다신론(多神論)이 지배하고 있고, 그리고 또 홍수의 동기는 인류의 죄에 대한 심판에 있지 않고 다분히 신들의 우발적인 감정변화에서 기인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그런 감정변화에는 또한 다분히 ‘인간의 지적 힘을 견제하려’는 신들의 의도가 강하게 나타납니다(cf. 아트라하시스Atrahasis 신화 참조). 무엇보다 더욱이 길가메쉬 서사시에서는 대 홍수의 파괴적 위력에 대한 신들의 공포감이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즉 홍수의 물결이 거셀 때 신들은 그들이 일으킨 홍수의 위력에 그들 자신이 겁에 질려 담벼락에 기대어 떨며 웅크리고 있는 모습을 보이거나 또는 홍수가 끝난 후에 인간영웅 우트나피쉬팀(Utnaphishtim)이 제사를 드릴 때는 그 향내를 맡기 위하여 제단 주위로 파리 떼처럼 모여드는 신들의 모습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구약성서의 노아홍수 기사와는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는데, 구약의 야훼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제사 향기를 맡으시고 ‘물에 의한 인류 진멸이라는 참혹한 재앙’은 다시는 더 이상 하지 않으시겠다고 작정하시며 다시는 아니’(never again)의 결단을 하시는 모습을 기술하고 있어서, 이 둘 사이에는 상당한 신학적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즉 구약의 야훼 하나님의 유일한 창조주권이 극명하게 돋보인다고 하겠습니다. 더욱 무엇보다도, 길가메쉬 서사시의 출발점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영생에 관한 신비한 비밀을 찾으려는 것이었고 또 영웅 우트나피쉬팀(Utnaphistim)은 비록 인간임에도 대홍수의 세계 종말적 위협에도 유일하게 살아남는 지혜를 얻어 신들과 비슷한 불멸(不滅)의 신적 존재가 되지만, 구약성서에서는 인간이란 스스로는 자신의 신비한 지식(gnosis)을 통해 불멸의 존재가 되는 길은 없습니다! 즉 흙으로 만들어진 몸[肉]속에는 ‘불멸의 영혼’(immortal soul)이 있어서 ‘신비한 지식’을 얻기만 하면 번데기가 나비가 되듯 그렇게 인간도 육의 겉옷을 벗고 영생불사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하는 가르침은 그 어떤 것이든 이교사설(異敎邪說)이 됩니다. 실로, 인간은 번데기와 같은 존재로 창조된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단지 ‘땅의 먼지’로 창조된 ‘사멸적 피조물’(死滅的 被造物, 창 2:7)로서 창조 때부터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흙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은 자일뿐입니다(창 3:19; 시 90:3 참조, 창 3:19에 대한 주석에 관해서는 칼럼2와 7을 참조하시시오).

 

더 많은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이, <노아 홍수 기사>는 고대 중동의 홍수설화들이 갖고 있는 그런 류의 신화적 요소는 결코 갖고 있지 않았음이 확실합니다.

 

길가메쉬의 이야기에 따르면, 친구 엔키두(Enkidu)의 죽음으로 큰 충격을 받았던 길가메쉬가 끝내 그 ‘죽음의 공포’라는 강박관념을 떨쳐버리지 못해 고민하다가 마침내 ‘신비한 지식’(그노시스)을 가지고 있다는 한 선구자, 우트나피쉬팀(Utnaphishtim; 구약의 ‘노아’와 비교되는 인물)이라는 사람을 찾아가 ‘죽음’과 ‘영생’의 신비에 관해서 물었더니, 그의 대답이 바로 대홍수에 관한 이야기였다는 것입니다. 즉 우트나피쉬팀이라는 그 현자는 신에게 위협적이 되어가는 인간들을 홍수로 쓸어버리려는 신들의 비밀 모의를 사전에 ('에아‘신의 현몽을 통하여) 알아내게 되었는데, 그리하여 그는 대홍수에 대비하여 배를 만들어 자신과 자신의 아내만을 홍수심판으로부터 건져낼 수 있었고 또 인간인 그가 감히 영생불멸의 신적(神的)인 존재가 되었노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으로 구성된 이 길가메쉬의 서사시는 아마 후대 그리스 철학에 이르러서는(cf. Greek Xisouthros) 소위 ‘영혼불멸’의 신비한 지식(그노시스)에 관한 교조를 만들어내게 한 그 원조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리스의 이 영혼불멸 교설은, 성서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 종교가 낳은 가장 매혹적인, 그리고 오늘의 서구 기독교 신앙을 완전히 장악한 가장 피하기 어려운 ‘이단사설’(異端邪說)이었던 것입니다. 즉 인간은 영생한다고 말하거나 인간은 스스로 영생할 수 있다고 말하거나 하는 모든 가르침은, 인간뇌가 곧 자발적 창조자였다고 하는 호킹 박사의 ‘위대한 설계’의 결론과 함께, 모두가 다 무신론적 신화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영생한다!” “사람은 [신비한 지식을 가지면] 스스로도 불멸할 수 있다!”는 가르침은 믿지 마십시오. 생사존망(生死存亡)은 “긍휼의 신”(엘-라훔, 출 34:6)의 ‘긍휼’ 여하에 달려 있다는 것이 히브리 성서의 중심 증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어떠한 현자(賢者, the Sages)나 영적 선구자(ancestors)의 신령한 지식(Gnosis)보다 신(神)의 성육(成肉, incarnation)이신 성서의 가르침(=바르게 해석된 성서의 말씀=kerygma=Logia)에 전적으로 더욱 귀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명심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귀 기울임이 다름 아닌 생명을 얻는 바로 그 유일한 길(요한 14:6)이기 때문입니다.

 

성서의 관점에 의하면,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지름길’(‘신비한 지식’)은 따로 없습니다. 즉 우트나피쉬팀(Utnapishtim)과 같이 신들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극비(極秘)의 신(神)의 회의(會議)의 모의(謀議)내용을 알아낼 수 있는 특별한 영적 지식(Gnosis)을 가진 사람이란 길가메쉬 신화(神話)에서나 가상적으로 존재할 뿐, 실재로는! 없는 허구입니다.

비록 우리가 태어나고 죽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이 정하신 것으로서 우리에게는 ‘운명’일지라도 그러나 운명 안에 있는 그 ‘삶’의 영위(營爲)는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freedom)의 지배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기에 그 무슨 ‘하늘의 숨은 비밀을 알아내는 특별한 영지’(靈智; 그노시스)가 따로 있고 또 그 ‘영지’를 알아낼 수 있는 그 어떤 특정 신화적 인물(우트나피쉬팀과 같은 인물)과 같은 인간이 있다는 것을 성서는 결코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운명 속의 삶을 우리의 ‘자유의지’로서 잘 다스려야 할 뿐입니다(창 4:7b). 중요한 점은 그 운명 다스림의 묘안이 결코! 우리 안에 있거나 또는 그 어떤 천기누설의 배신자(Ea신이나 우트나피쉬팀이나 Lucifer와 같은 신화적 존재)가 따로 존재하거나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운명 안에 있는 ‘삶’을 우리의 자유가 다스릴 수 있도록(창 4:7b) 도움을 주는 길안내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 안에만 있을 뿐입니다(신 30:11-14; 32:47). 이 사실이 그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노아 홍수 기사는 바로 이 사실을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 증언의 핵심은 바로 이것입니다. 즉 <‘’는 심판을 가져오지만 그 ‘심판’은 ‘은총’(never again!)을 담보로 하여 우리를 ‘경고’한다. 바로 이 ‘경고’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다.>는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길가메쉬 서사시는 이 중요한 사실은 말하지 않고 ‘영지’를 갖고 있다는 소문을 달고 다니는 그 어떤 영웅의 ‘영지’(그노시스)의 효력만을 추구하게 만듭니다. 이것은 그릇된 길이요 미망이요 허구이며 ‘구원의 생명’이 없는 길, 길이 아닌 길일뿐입니다. 길가메쉬가 우트나피쉬팀을 찾아가듯 일획천금을 제공할 ‘영지’를 찾는 일은 ‘허무’ 또는 ‘허구’ 그 자체일 뿐입니다. 그러한 ‘영지’(靈智, gnosis)는 이 우주 어디에도 없는 것입니다. ‘빈 말이 아닌 생명의 말씀’(신 32:47)인 ‘하나님의 말씀’(Davar:Logos)은, 그러나, “어려운 것도 아니고, 먼 것도 아니며, 하늘에 있는 것도 아닌”(신 30:11) “우리의 마음에 있고 우리의 입에 있어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것”(신 30:14)입니다. 이 사실이 그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따라서 노아홍수 기사에 대한 ‘재 숙고’(再 熟考)는 다음을 말할 수 있게 합니다.

 

<‘죄’는 심판을 가져오지만 그 ‘심판’은 ‘은총’(창 9:11,15)을 담보로 하고서! 우리를 ‘경고’한다. 이 ‘경고’가 바로 우리를 살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렇습니다. 노아 대홍수 기사 속에 담긴 교훈은, 일반적으로는, 인간의 죄가 심화되면 하늘이 인간을 심판하게 되지만 그러나 종국에는 사랑의 하나님께서 그의 무한한 사랑 때문에 우리를 무조건 용서하시고 우리를 구원해내시고 마신다는, 이른 바, ‘무한 은총’에 관한 교훈으로 끝맺음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 노아홍수 기사의 최종 결론(창 9:8-17)은 우리에게 <무지개>(히브리말 ‘케쉩’ qesheth)계약을 복음증언의 결론으로 제시함으로서! 성서의 구원사적 복음을 '스포일'(spoiling)시키는 데서부터 건져내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합니다. 노아 홍수기사(창 6:5-9:17,28-29)의 최종 결론(창 9:8-17)은, 놀랍게도, 다시는~않겠다(never again; 창 8:21→ 9:11,15)라는 야훼 하나님의 결심선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분명, 이것은 논의의 여지없이 ‘[물]심판을 다시는 하시지 않겠다.’는 야훼 하나님의 강력한 구원사적 의지를 선포한 결구(結句)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문자적 이해를 고집하는 것은 해석학적 오류라고 보아야할 것입니다. 예컨대, ‘물 심판’은 없겠지만 ‘불 심판’(cf. 창 19장의 소돔 심판)은 계속된다든가, 아니면, 역사 종말의 심판은 ‘불 심판’일 것이라든가, 하는 등등의 해석은 ‘심판은 없다’라는 주장과 함께 심각한 해석학적 오류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홍수와 해일의 대 재앙은 노아계약 이후에도 끊임없이 나타났고 광야 유랑 때 나타난 갖가지의 재앙과 가나안 복지에 들어간 이후에도 끊임없이 일어났었던 그 치를 떨게 할 전쟁 재앙들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 지상에 일어난 참혹한 자연재해들이나 전쟁 재앙들, 원자핵의 위협 등등은 분명 ‘다시는 않겠다.’는 신의 은총약속과는 전혀 충돌이 없을 것이라는 믿음은 오류라는 것은 분명 불문가지(不問可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지개계약’(노아계약 또는 노아홍수 사건)의 의미를 좀 더 깊이, 좀 더 신중히 재고하여야 할 것이라 하겠습니다. 즉 노아 홍수의 대미(大尾), 이른바, ‘다시는~않겠다.’(never again)는 신의 구원약속이 왜 하필 ‘무지개’의 계약으로 귀결되는지(?)를 묻는 것은 해석학의 당연한 과제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신의 은총약속과 영원계약(창 9:16)의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볼 때 물론 분명한 것이기는 하여도 ‘다시는 [심판] 않겠다.’는 이 신의 약속은, 흔히 현대 학자들이 ‘무조건적 계약’논리에 의하여 주장하듯이 그렇게(C. Westermann, Genesis 1-11, 473-4), 결코 문자 그대로 고집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세상은 날로 더해가는 흉흉한 전쟁소식과 예측불허의 자연재해 및 전혀 희망을 기대할 수 없는 ‘인간지식의 타이탄주의(titanism)’의 위험이 우리 안에 늘, 그리고, 어김없이 상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노아계약의 ‘무지개’(rainbow←bow) 표상(表象)은 그러므로 새롭게 해석되어야 할 것입니다. ‘무지개’는 히브리어로 ‘케쉩’(qesheth)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구약에서는 전혀 배타적으로 전쟁용 무기인 ‘활’을 가리킵니다. 이 점은 본 필자가 권위 있는 히브리어 어휘사전(G. Lisowsky, Konkordanz zum Hebraeischen Alten Testament, 1958)을 통하여 조사한 바로는, 이 어휘는 구약 전체에서 77회 정도 사용된 어휘인데, 여기 창 9:9-17에서 세 번 사용된 것과 에스겔 1:28에서 한 번 사용될 때만 ‘신의 초월적 영광계시’를 나타내는 의미로 ‘무지개’라는 어휘를 사용할 뿐, 나머지 73회는 모두가 ‘신의 심판’을 가리키는 은유(隱喩)로서 사용된 ‘전쟁용 무기’인 ‘활’(bow)을 가리킬 뿐이었습니다. 이 ‘무지개’가 여기 우리의 본문에서도 ‘전쟁용 무기’이며 ‘전쟁용사’(the Divine Warrior)이신 야훼의 심판도구라고 하는 지적은 19세기와 20세기를 각각 대표하는 벨하우젠(J. Wellhausen)과 궁켈(H. Gunkel)이 비교종교사적 관찰을 통하여서도 이미 지적한 사실이기는 하지만, 여기서도 또한 피비린내의 ‘전쟁용 무기’를 가리키는 것임이 확실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그 의미는 전적으로 ‘신의 은총’의 문맥 안에! 들어와 있다고 하겠습니다. 즉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둘 터이니”(창 9:13)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나타나면”(창 9:14) “나는 내가 세운 이 계약을 기억하고 다시는 홍수를 일으켜서 생명들을 진멸하지 않겠다.”(창 9:15)라는 문맥은, 분명코, 여기서의 ‘신의 은총’이란 무조건적이면서도 그러나 ‘경고’의 의미도 분명히 담은 은총으로 이해하게 한다고 하겠습니다. ‘경고를 담은 은총’!! 이것이 노아홍수의 무지개 계약이 갖는 진정한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무지개가 구름 사이로 나타날 때마다 너희는 오색영롱한 아름다움의 은총만이 아니라! 동시에 하나님의 활의 심판도! 기억하라는 명령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명령은 출 34:6-7의 ‘모세 재계약’ 때, 야훼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시면서 하신 말씀(나는 긍휼과 은혜의 신으로서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신이다. 인자는 수 천대 까지 이지만 벌은 면제가 아니라 삼사 대까지다.)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이 말씀은 또한 마태 24:37-39와 누가 17:26-27,30의 우리 주님의 말씀(“인자가 올 때에도 노아의 때와 같을 것이다.”)과도 일치합니다.(cf. 히 11:7; 벧전 3:20-21; 벧후 2:5) 여러분도 꼭 깨어계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