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제목바벨탑 신드롬(症候群) 김이곤 2011-08-102021-10-20 14:49

<바벨탑>에 관한 성서기록은 아브라함 이전의 고대역사(창 1-11장, prehistory)가 끝나는 ‘결론 부’(창 11:1-9)에 들어있습니다. 즉 <바벨탑> 기사는 아브라함의 역사 출현과 그의 소명(召命) 사건의 의미를 특별히 부각시키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말하자면 <바벨탑> 사건은 야훼 하나님께서 왜 역사의 이 시점에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셨는지를 설명해주는 기능을 갖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유랑자 아브라함, 그는 왜 이 시점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힘없는 나그네(창 14:13; 23:4) 신분으로서 이 험악한(창 47:9) 세계사에 등장하게 되었을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우리의 본문(창 11:1-9)은 다음과 같은 말로 설명합니다.

“자, 도시와 탑을 세우고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도록 하자. 그리고 우리의 이름을 높이고 온 땅에 흩어지지는 않도록 하자!”라고 사람들이 말하자, 야훼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아, 사람들이 이와 같이 한 가지 언어를 사용하는 족속이어서 이런 일을 시작하였구나. 그들이 이젠 하고자만 한다면 무엇이든 하지 못할 일이 없겠구나, 자, 우리가 내려가서 그들의 말을 뒤섞어서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도록 하자.” 하셨다.(창 11:4,6-7)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에 의하면, 바벨탑 이야기는 창세기가 갖고 있는 신학전승 중 매우 오래된 전승으로서, 과거에 있었던 어떤 한 상황이 어떻게 현재의 상황으로 바뀌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일종의 원인을 설명하는 이야기(etiology)의 성격을 가진 기록입니다. 즉 태초에는 인류가 소수였고 또 ‘동일’ 언어를 사용하였을 것인데 왜 지금은 이렇게 인류가 온 땅에 충만하도록 많이 퍼져있고 또 그 인류도 왜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언어들을 사용하고 있는 것인가? 라고 하는 물음에 대하여 대답하는 기능을 하는 기사(記事)라고 하겠습니다.


바벨탑 이야기에 나오는 이러한 ‘원인을 설명하는 기사(記事)’는, 예컨대, 여인의 해산하는 고통의 그 원인을 설명하는 ‘원인론 이야기’(창 3:16)와도 비슷한 것으로서, 이른 바, 이 세계사의 질서 안에서는 도저히 그 원인을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신앙적으로 설명하는 ‘원인론 기사’입니다.


그러나 바벨탑 이야기에 나오는 원인론적 설명은, 창 1-11장에 나오는 동일 성격의 다른 ‘원인론적 이야기들’과는 그 문학구성에서은 다소 다르게 ‘변증법적 구성구조’를 갖고 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즉 이 ‘바벨탑 이야기’는 창 1:28과 9:1에 나타나는 그의 창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 즉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 흩어져라!”라고 하시며 인간을 ‘축복’해주시는 그 하나님을 인간은 오히려 불신하고 대적하여 하나님의 이름보다는 자기 이름을 높이려고 “자, 우리의 이름을 날리고 온 땅으로 흩어지지는 말자!”(창 11:4)라고 외치며 하나님과 대적하여 맞서서 대동단결하는 인간의 행위란 <인간의 지능적이고도 반역기질이 있는 거인주의적인 ‘오만’>이라고 하는 것을 설명해주는 성서기록입니다.


그러므로 ‘출산 때 여인이 진통을 겪는 고통의 그 원인’을 ‘첫 여인의 범죄’에서 찾듯이, 여기 바벨탑 기사(記事)도 또한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하나님께 저항하되 흩어지지 말고 대동단결하여 하나님과 맞서자! 는 저 지능적인 거인주의의 오만 (titanic hubris)이 바로 <하나님께서도 더 이상 방관하실 수 없는 ‘인간의 최대 범죄’>라고 규정하는 성격의 ‘원인론’으로 형성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여기서 고도의 지능적인 인간의 저 ‘불신’과 ‘불복종’의 세계, 이른 바, 바벨탑 이후의 세계를 타개할 ‘믿음의 조상’으로서 ‘부름’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가라!’(창 12:1)는 ‘부르심’[召命]을 받았을 때, 비록 갈 바를 알지는 못했으나 ‘믿음으로 복종하고’ 모든 것(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버리고 떠나갔던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서 아브라함은 바벨탑 이후의 불신세대가 모두 우러러야 할 영원한 믿음의 조상(히 11:8-19)으로 선택된 것입니다. 따라서 21세기 세대는 ‘바벨탑 신드롬’을 격퇴, 극복해야 할 세대로서 주목받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바벨탑이라는 말은 강대 제국의 자존심과 오만함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널리 알려진 고대 바벨론의 직구라트(Ziggurat)라고 이름 하는 높은 ‘신전 탑’에서부터 유추(類推)한 상징 언어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계단식으로(stufenartig)!! 끝없이 쌓아올려 신(神)의 노아 대홍수 심판도 능히 막아낼 만큼 하늘로 무한! 쌓아 올리는 계단식 건축물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이른 바, 신(神)에게 항거하는 인간의 거인주의적인 오만을 상징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서는 이에 대한 야훼 하나님의 반응을 오히려 매우 시니컬하게 표현하면서도, 동시에 이 사건 자체를 ‘매우 위험스러운’ 사건으로 묘사하는 일종의 ‘이중적 표현’을 구사하였습니다. 이런 성서적 표현이 갖는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요? 이런 바벨탑 상징을 성서기자는  전(前)역사와 실(實)역사를 잇는 아브라함의 소명 사건에 연결시킴으로 선민(選民)의 대속적인 인간 구원역사 출범을 촉진하는 매체’로 사용하였을까요? 분명 여기에는 여러 가지 극대화한 인본주의적 욕망들에 대한 성서적 비판논리들이 내재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1) 
우선, 신(神)에 대한 인간의 신성모독적 저항 증후군이 감지됩니다. 신화의 세계에서도 흔히 나타나지만, 인간의 그 성정(性情) 속에는, 일종, 이드’(id)와도 같은 ‘본능적 충동’인, ‘신(神)과 같이 되려는 욕망’이 있었습니다.(창 3:5-6)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홍수 신화인 ‘아트라하시스’ 신화(Atrahasis, a social myth)도 말하듯, 이 ‘이드’(id)는 종이 주인의 주권을 빼앗으려는 ‘해방의지’(극단 인본주의)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신(神)의 불꽃(출 3:2-3)을 닮아서 꺼질 줄을 모르는 일종의 ‘무한욕망’이기도 합니다. 비록 그것이 생물학적 유전성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지만, 그 세력이 너무나 줄기차서 아담 시대로부터 바벨탑을 기획한 사람들의 시대에까지 이어진 것이며, 그것은 또한 창세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이후의 오늘의 성령시대에 이르기까지도 조금도 지칠 줄 모르게 계속되어 온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저항이 성공한다는 것은 원초부터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있게 하는 것’(One who causes to be)과 ‘있는 것(있게 된 것)’(one who is)은 본질상 유비(類比)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즉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관계에서는, 본질상, 더 이상 피조물이 창조자가 될 수 있는 길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지적 발전’(‘진화’)의 역사를 보면, 이 저항은 우리 인간들에게는 언제나 유혹의 대상이 되어왔던 것입니다. 필자의 개인적인 관찰에 의하면, <니체-러셀-도킨스-호킹>에 이르는,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무신론 선교의 대중화’는 일종 이 유혹에 걸려든 ‘포획물’로 보입니다.


(2) 
다음으로 우리는 ‘교조지상주의’라고 하는 이즘’(ism)증후군이 또한 감지되고 있음을 봅니다. 여기서 ‘교조지상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통속적인 의미의 ‘보수-진보’라는 구도에서 하는 말이 아니라, 비록 그것이 수구적 입장이건 진보/개혁적 입장이건 간에, 자기의 주의주장만을 절대 교조로 사수하는 사고(思考)와 그 행위 일체를 가리켜서 지칭한 말입니다. 말하자면, 좌파와 우파의 대결양상 같은 데서 흔히 잘 볼 수 있듯이, 예컨대, 좌파는 우파를, 우파는 좌파를 무조건! 정죄하고 인정하지 않는 경향 같은 것을 염두에 두고서 ‘이즘’(ism)이라는 이름을 붙여 보았습니다. 좌파는 우파의 말이라면 콩을 콩이라고 하여도 그것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우파도 또한 좌파에 대해서는 그러합니다. 바벨탑의 ‘거인주의적인 오만’에는 이런 유형의 ‘절대교조주의’가 하나의 ‘이드’(id)가 되어 우리 세계의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이 칼럼의 주요 관심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런 성향은 정치, 경제, 교육, 종교 등등, 그 어디에서건, 널리 편만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 날의 한국정치에서는, 비록 정권 쟁취가 정치의 주요 목표라고는 하지만, 정권쟁취를 위해서는 선과 악, 정의와 불의의 진위(眞僞) 따위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을 봅니다. ‘이윤추구’를 구극목표로 하는 경제계는 더 말할 것도 없지만, ‘교육계’마저도 그러해서 학교도 이젠 ‘교육’이 목표가 아니고 ‘기업’이 그 목표가 된지 오래입니다. ‘무상급식’ 문제와 ‘반값 등록금’ 문제가 정치쟁점화 되면서야 비로소 교육의 본래적 사명문제가 ’도마‘ 위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이런 자기모순 현상이 가장 알기 쉽게 그리고 가장 심각한 위기의 현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곳은 역시 종교계입니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이라는 세 유일신 종교는 말할 것도 없고, 또 신(神)의 존재에 대한 전제가 불투명한 유불선(儒佛仙)의 세계에까지도, 이른 바, ‘본질상실’!!이라는 사악한 위선이 주도권을 장악하여 그 위세를 맹렬히 떨치고 있음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무신론자들이 흔히 하는 말로서, <종교가 무신론보다는 엄청나게 수익성이 높다!>(D. Mills, 『우주에는 신이 없다』P. 53)라고 빈정대듯이, 한국사회를 보면 ‘대형교회’는 웬만한 재벌보다는 그 경재기반이 훨씬 더 튼튼한 것을 봅니다. ‘교회주의’ 우상은 이 때문에!! 많은 목회자들에게 있어서는 인간구원보다는 훨씬 더 중요한 목회의 절대과제로 각인되고 있고 그러므로 하여 ‘대교회주의’는 사람으로서는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는(창 11:7) 새로운 바벨탑의 오만’(neo-titanic hubris)으로 군림하게 됩니다.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그리하여 평신도들은 참으로 불쌍한 자들이라는 안쓰러움까지 느껴집니다. 오호라! 저들을 사망의 굴레에서 누가 건져내랴!! 실로, 목사양성기관의 책임자로 있었던 나로서는 자괴지심을 금할 수 없습니다. 신학교 교수 시절, 나는 그런 책임감을 전혀 갖지 않았던 것은 아니나, 그러나, 비록 변명에 불과하겠지만, 중과부적이요 능력부족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회개하는 심정으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나는 무신론자도 무교회주의자도 아닙니다. 오히려 절박한 심정으로 그들과 대항해 싸우고 있는 자일뿐, 단지, 교회 마당을 밟는 모든! 분들이 제발 마당만 밟지 마시고 자신의 구원문제에 관한 맹렬한! 깨달음을 가지시기만을 소원할 뿐입니다.


3000여명 교인을 가진 교회를 목회하는 어느 목사님 한 분이 “만 명 교인만 만들 수 있으면 무소불위의 군왕이 될 수 있을 텐데!”라고 하면서 고심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만, 이런 사고방식이야 말로 신형 바벨탑 신드롬이 아니고 달리 무엇이겠습니까? 이러한 사고(思考)가, 이른 바, ‘교회론’이라는 ‘교리’와 잘못 접맥(接脈)이 될 때에는 진실한 인류구원 사역(使役)이라는 것은 완전히 물 건너 간 것이나 다름이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대교회주의’가 하나님의 지상명령으로 착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부활하신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그의 제자들에게 지시하신 바, 저 승천 직전의 유언의 말씀, “내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다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8-20)라는 말씀을 크게 왜곡 해석하여 십자군 전쟁을 다시 일으켜서라도 ‘기독교 제국’을 건설하라는 명령으로 착각!!하기에 이릅니다. 이 착각이야 말로 결코 단순한 착각에 의해 일어난 일시적 불행만으로 끝나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 한 분명한 예로서는, 바로, 아주 최근(2011년 7월 22일) 노벨 평화상의 나라인 노르웨이의 우토야 섬에서 일어난 ‘브레이빅’이라는 32세의 기독교 극우파 금발 미남형 청년이 저지른 이교도(異敎徒/異文化)에 대한 잔학무도한 무차별 살상사건(약 76명 사살)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저 살인마 ‘브레이빅’이라는 청년은 법정에 서서는 오히려 당당하게 “나는 이슬람교도로부터 서유럽을 구하고 싶었다.”라고 주장하였다고 하니, 글로벌 평화지수 세계1위(2007년) 국가인 노르웨이의 평화신화는 여지없이 깨어지게 되었고 소위 말하는 유럽인들의 그 자랑스러운 톨레랑스(tolerance; 寬容之心)의 자부심도 그만 대양(大洋)에 수장(水葬)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기독교의 배타주의 신앙은 이로서 ‘바벨탑의 거인주의적인 오만’의 자리에 당당하고도 뻔뻔하게 서있게 된 셈입니다. 이야말로 수치스럽고도 수치스러운 기독교의 본질이탈의 범죄행위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바벨탑 기사에 뒤이어 나온 셈 족의 족보가 등장하자마자 곧바로 아브라함의 선택소명(選擇召命)사건(창 12:1-3,4-9)이 연이어 소개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하겠습니다. “이 후로는 [인간들의]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창 11:6b)라는 ‘신의 근심’(擬人法的 표현; anthropomorphism)의 이유가 무엇인지도 또한 분명해졌다고 하겠습니다.


세계 기독교화! 또는 세계 복음화! 라는 세계선교의 미명 아래 자행되고 있는 기독교 제국주의 운동(십자가 군병 운동, crusade)과 맘모스 교회 추구라는 물량주의적(=신 바알주의적) 교회주의 운동을 우리는 순교자적 심정으로 멈추어야 하고! 회개하여야 합니다!!! 21세기의 지상교회가 나아가야 할 제1의 과제는 분명 이러한 ‘바벨탑 거인주의 신앙’(대교회주의 신앙)을 극복하는 길이라고 나는 확신하고 또 확신합니다.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시 2:4 cf. 창 11:7)


이 시편 2편 시인은 장차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실(마 16:18→마 16:19-21) 그 메시아 예수를 미리 내다보며 야훼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대언(代言)한 바 있습니다. “내가 야훼의 명령을 전하노라. ‘너[메시아→예수]는 내 아들이다.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養子로삼았다. cf. 롬 1:4). … 뭇 나라를 유산으로 내가 네게 주겠다. 내가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를 너의 소유가 되게 하겠다. 그리고 네가 그들을 철퇴로 부수며 질그릇같이 부수겠다.’라고 말씀하셨다.”(시 2:7-9; cf. 행 13:33; 히 1:5; 5:5)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시편 시인의 영감 받은 증언은 그리하여 이미 창 11:7-8에서 예견되었고(“‘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야훼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바벨탑]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창 11:7-8) 그리고 먼 후일, 이를 이어받은 시편 2편 시인은 다시! 이 말씀을 메시아 사건과 연결시켜 예견하였으며, 이 시인의 메시아 예언은 또한 오늘의 ‘우리’ 안에서도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을 신약성서 기자들도(행 13:33; 히 1:5; 5:5) 또한 분명하게 증언하였던 것입니다.(2011. 7.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