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제목인간은 왜 죽는가? - 창 2:7; 2:17; 3:19; 시 90:1-5를 중심으로 김이곤 2011-04-022021-10-20 14:47

인간은 왜 죽는 것입니까? 인간은 왜 태어나고 또 왜 죽는 것입니까? 너무나 상식적인 이 ‘생과 사’라는 당위의 사실에 대해 우리는 지금, 4월의 ‘부활절 계절’에 즈음하여, 강한 의문부호를 붙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이 물음에 대하여 결코 모호한 ‘논리’로써 ‘생과 사’의 그 이유와 그 의미에 대해서 침묵 또는 회피하는 태도를 취하지는 않습니다.


성서, 특히, 구약성서는 전적으로! 하나님 경험들에 의거한 신앙고백’에 근거하여! 이 모든 천지만물을 있게 하신 그 ‘창조주 하나님’을 얼굴(본체)로서가 아니라(①말씀, ②자연, ③역사)으로서는 우리가 언제나 만날 수 있고 또 반드시 만나야 한다는 것을 ‘성서 특유의 은유 언어’(출 33:17-23)로 분명하게 증언한 다음, 주저 없이, 우리가 왜 태어나고 또 우리는 왜 죽는가? 라는 이 물음에 대하여 조금도 모호하지 않는 확실한 대답을 합니다.


우선 성서는 말씀(로고스)계시’를 통해서 먼저 증언하고 있습니다. 즉 성서는 “유일하신 창조주께서 태초에 말씀하시기를 ‘태어나라!’(‘있어라!’)라고 말씀하셨고 그 다음 그 태어난 우리를 향해서는 장차는 흙으로 돌아가라!’(‘죽어라’)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창 1:26; 3:19; 시 90:3)이라고 하는 ‘대답’을 제시합니다. 즉 태초에, 거기에는, 창조신께서 이미! 일하고 계셨다(창 1:2)는 것이며 그리고 그분은 이미 그분 자신의 ‘뜻’(‘있게’하시기도 하고 또 ‘없게’하시기도 하시는 그분의 뜻, 신 32:39; 삼상 2:6 참조)을 확정하신 후 줄곧 지금까지 쉬지 않고 그가 창조하신 역사 속에서 그 뜻을 펼쳐 오셨고 또 앞으로도 펼쳐 가실 것(시 121:3-4 참조)이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요 5:8). 바로 이것이 우리의 근원적인 물음에 대한 성서의 대답이며 성서를 통한 신의 ‘계시’라고 하겠습니다.


‘말씀 계시’ 뿐만 아니라, 구약성서의 한 시편 시인은 또한 이렇게 고백한 바가 있습니다. 하늘은 신(神)의 영광을 드러내고 창공은 그의 솜씨를 알리도다. 낮은 낮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속삭이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고 여느 소리 아니 들리나, 그들의 속삭임 온 땅에 퍼지고 그들의 노랫가락 세상 끝까지 번지도다.(필자 私譯; 시 19:1-4b[2-5b]) 즉 이 시편시인의 이 증언은 논의할 여지없이 자연(창조된 만물)계시를 통하여 신의 실재에 관한 증언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 시편 시인의 증언에 대하여서는 “[자연 질서는] 인간이 결코 핑계를 댈 수 없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속성”이라는 말(롬 1:20)로 화답한 바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자연’ 그 자체가! 신의 실재를 증언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거기에는 세 번째의 하나님의 계시활동, 즉 역사를 통한 하나님의 자기계시 활동이 언급됩니다. 이른 바, 그토록 도도하게 70여년이나 이스라엘을 포로로 볼모잡아 식민정치를 하던 그 난공불락의 신흥 바빌론제국이 전혀 예기치도 못한 때 졸지에 무너지고 한 이방 제국(페르시아)의 영웅, ‘고레스’(cyrus)라는 사나이가 바빌론에 무혈입성하자마자! 전혀 뜻밖에도! 포로 된 이스라엘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조국 귀환의 칙령을 반포할 때, -- 마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창공의 버섯구름 사이로 조선의 해방 메시지가 들릴 때처럼 그렇게 뜻밖의 한 ‘소리’가 들릴 때(사 40:3)-- 포로지의 한 익명의 예언자(사 40-55장)도 마치 득도(得道)나 각(覺)에 이른 사람처럼 무릎을 힘차게 내려치며! 이렇게 말한 바가 있습니다. “아, 오직 한 분의 신이 계신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신 야훼여, 주는 ‘자신을 숨기시는 신’(Deus absconditus)이십니다(사 45: 14c-15). 말하자면, 성서는 ‘자신을 역사사건들 속에 숨기시는 신’ 그가 바로 다름 아닌 역사(역사사건들)를 통하여 자신의 실재를 계시하시는 유일신이라고 주장하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억겁을 헤아리는 시간 동안 거듭거듭 반복해온 우리의 이 인류 역사를 ‘도전’ (challenge)과 응전 (response)의 변증법적 관계의 역사라는 문맥에서 관찰하였던 역사가, 즉 수메르-아카드 문화로부터 기독교-이슬람 문화에 이르는 역사를 그런 관계의 역사문맥에서 문화사적으로 되돌아보던 아놀드 토인비(Arnold Toynbee)와 같은 대 역사가조차도 그의 대표적인 저서(A Study of History, New York: Oxford Univ. Press,1972, 497-8)의 그 결론부분에서, 전혀 예기치 못하게도! 이 역사현상의 ‘배후’에 있는 그 어떤 ‘궁극적 실재’에 관한 물음을 제기하면서, 우주와 인류 역사의 최 종국에 대한 다분히 종교적인 성격의 ‘응답’을 이슬람의 ‘꾸란’(‘코란’)의 언어로 그의 주저(主著)를 다음과 같이 끝맺고 있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롭고도 주목할 만하다고 생각됩니다. 즉 “너나 할 것 없이 너희 모두는 그분[神]에게로 돌아가거라!”(Qu’ran x.4)


그러나 ‘꾸란’으로부터 인용한 이 ‘성구’(聖句)는, 사실, 구약 시편 90:3의 말씀이기도 하며! 이 시 90:3의 말씀은 또한 창 3:19(J)와 창 2:7(J)의 말씀에 근거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즉 시편 90:3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죽을 인생들아, 돌아가거라!’ 라고 하셨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시편보다 앞선 시기의 것으로 보이는 창세기 3장 19절(J)도 또한 이렇게 증언하였습니다.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까(ki-)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그 때까지는(‘adh) 너는 얼굴에 땀을 흘려야 곡식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꾸란’은 인생이 돌아갈 종착점을 ‘신’(알라)으로 증언하였으나, 그러나, 시 90:3과 창 2:7과 3:19는 인생이 돌아갈 종착점을 하나님께서 태초에 인간을 지으실 때 재료로 사용하셨던 그 ‘흙’(‘티끌’=daka’=‘aphar)이라고 증언하였습니다. 형식논리로는 ‘꾸란’과 구약성서가 서로 비슷하게는 표현하였지만 그 신학적 깊이에 있어서는 상당히 다르게 표현되었다고 하겠습니다. 구약성서는 ‘인간’은 죽으면 자연적으로 스스로 ‘신’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신’이 인간창조 때 사용하신 재료인 그 ‘흙’으로 먼저 돌아가게 되고 그 다음 그 인간은 단지(!) 창조신의 자유로우신 뜻에 맡겨지는 것뿐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실로, 성서의 증언은 전혀 모호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신학적 인간학이 매우 분명함을 보여줍니다. 즉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세상에 왔다가 또한 신의 명령에 따라! 그 왔던 곳인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은 결코 ‘스스로’ 신(神)의 품으로 돌아가 ‘자동적으로’ 신(神)의 일부가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죄의 결과’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인간은 본질적으로 그가 죄를 지었든 아니 지었든 그것과는 상관없이 모든 인간은 처음부터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죄의 결과는 죽음이지만(창 2:17) 모든 ‘죽음’이 다 ‘죄의 결과’(롬 6:23)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창 3:19에 대한 현대의 모든 학문적 주석가들은 창 3:19를 인간의 타락에 대한 신의 징벌의 언어로는 결코 보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그때 까지는”(히브리어 ‘adh)이라는 말과 “왜냐하면”(히브리어 ‘키’ ki-)이라는 말을 근거로 하여 창 3:19를 결코 ‘사망’을 죄의 결과라고 말하는 구절로는 보지 않습니다. 따라서 창 3:19에 대한 올바른 번역은 “너는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는 얼굴에(‘코’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너는 [본질상] 흙이어서 흙으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가 될 것입니다. 즉 타락에 대한 징벌은 ‘죽음’이 아니라, ‘흙에서 난 자가 그 본래의 흙으로 돌아갈 그 때까지의 [일생동안] 먹을 것을 얻기 위하여 일할 때의 그의 그 <노동>이 저주를 받았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말인 롬 5:12,20; 6:23; 7:24 그리고 야고보의 글 1:15를 ‘사망은 죄의 결과’라는 의미로서 해석하는 것은 해석의 오류라고 하겠으며 오히려 그것은 전적으로 창 2:17(죄를 지으면 죽는다는 경고)의 문맥에서 해석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의미의 문맥에서 창 3:19와 시 90:3 그리고 ’꾸란‘ x.4의 의미도 또한 이해하여야할 것입니다. 즉 ‘모든’ 인간이 죽는 그 죽음은 ‘타락 또는 죄의 결과’가 아니라, ‘흙으로 구성된 인간 본질’의 당연한 귀결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이 부분에 대한 성서해석학적 오류는 <모든 죽음은 타락의 생물학적 유전의 결과>라고 획일화하는 그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전제를 가지고 창 3:19(& 시 90:3)와 ‘꾸란’ x.4를 대조해 보면, 이슬람은 유대교 및 기독교와 함께 전적으로 <구약신앙 전통>에 근거한 ‘하나의’ 뿌리를 갖고 있는 세계 3대 유일신 종교를 구성하고는 있지만, 그러나 그 형성시기로 볼 때는 유대교→기독교→이슬람이라는 연대기적 차서를 가지고 있으므로 이 성구들의 본원(本源)은 논의의 여지없이 구약신앙 전통이라고 볼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구약성서 
창 2:7(J)에 의하면, ‘인간’이란 하나님께서 주신 ‘생기’를 선물로 받아서 그 받은 ‘생명’이라는 은총의 선물에 힘입어 단지 그 받은 바의 ‘일생’(흙→흙)을 사는 피조물일뿐이라는 것입니다. 즉 ‘인간’은 결코 창조주가 <아니며>(cf. 시 100:3) 그러므로 인간은 신[靈]이거나 반신(半神)도 또한 <아닌>! 단지 하나의 피조물일 뿐입니다. 즉 인간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하늘, 땅, 물, 불, 동물, 식물 등등)의 한 일부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선물로 받은 존재’(창 2:7)인 우리 인간들의 
유일한 희망이란, 오직, 태초 때부터 우리에게 ‘생명’을 선물로 거듭거듭 주셔 오셨던 ‘창조주 하나님의 그 [모성적] 긍휼’에만 전적으로 의존해 있다는 것이 성서의 기본 입장이라고 하겠습니다.(이 ‘생명’[‘네페쉬’]을 가리켜 詩的인 표현으로 ‘영혼’이라고 부르는 성서의 진정한 현실은 소크라테스-플라톤적 헬레니즘을 극복한 사람들에게는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봅니다만, 그러나, 영혼불멸(靈魂不滅)의 플라톤교설을 믿고 거기에 의지하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은 잘못된 인간이해에 빠지도록 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될 것입니다.) 즉 “부활로 인간을 재창조해 주시겠다.”는 창조주 하나님의 인간구원(새 창조, 갈 6:15) 약속, 거기에만 우리 인간들의 전(全) 운명과 희망이 걸려 있다는 것이 성서의 중심증언인 것입니다.


비록 암스텔담의 한 물리학 교수인 에리크 페를린데(E. Verlinde)는, 호킹(S. Hawking)과는 다소 다르게, “중력은 자연에 원래부터 존재하는 힘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우주의 법칙, 즉 보다 근본적인 ‘그 어떤 존재’가 중력이라는 현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라는 이론을 내세우기도 합니다만(이론 주장), 그런 물리학 이론이야 어찌되었든, 성서의 하나님 증언은 그 어떤 이론이나 가설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역사를 통한 하나님 체험의 고백>이므로 그 차원이 전혀 다르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주가 神에 의하여 창조되었다면, 그 神은 누가 창조한 것일까?>라는 물음으로 문제의 본질을 비껴가서는 안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철학이나 과학은 神의 실재에 관한 물음을 존재론적으로 물어가지만, 성서는 神에 관한 증언을 존재론적으로가 아니라 “신의 자기계시에 대한 인간의 역사적 체험”에 의거해서 증언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은 본질적이고도 운명적인 것이지만 동시에 역사경험적인 것입니다. 비록 ‘죽음’을 극복하려는 인간적/종교적 노력과 희망은 거기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노력과 희망이 인간에 의하여 이루어진 적은 한 번도 없는 그런 운명적이고 당위적인 것이 인간의 ‘죽음’입니다. 그럼에도 ‘죽음’은, 비록 인간이 자신의 경험에 의한 ‘논증’은 제시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역사에 대한 경험을 통해서만은 불가역적으로 거듭거듭 확인한 사건입니다. 다윗 왕은 밧세바와 간통한 후 얻은 첫 아이가 야훼의 심판을 받고 죽을병에 걸렸을 때, 그 아이의 치유를 위하여서는 식음을 전폐하며 슬피 울었지만, 막상, 그 아이가 죽자, 오히려 슬픔의 자리를 틀고 일어나 목욕한 후 옷을 갈아입은 뒤 성전으로 들어가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고 또 금하였던 음식을 차려오게 하여 먹자, 신하들이 궁금하여 그 연유를 물었습니다. 그 때, 다윗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아이가 살아 있을 떼에 내가 금식하고 슬피 운 것은 혹 야훼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그 아이를 살려주실지 모른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오. 그러나 이젠 그 아이가 죽었는데 무엇 때문에 계속 금식하겠소? 내가 그를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겠소? 나는 그에게로 가겠지만 그는 나에게로 올 수는 없소.”(삼하 12:22-23)


다윗의 이 대답은 우리의 논제에 대한 대답을 어느 정도는 정리해 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즉 ‘모든’ 인류가 태어나고 또 ‘모든’ 인류가 죽는 것은 전적으로 창조자 
하나님의 명령에 속하는 것으로서 일종의 ‘운명적’인 것이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일생의 삶은 운명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지’에 맡겨진 것(*창 2:17; 4:7 참조!)이라는 말입니다. 파울 틸리히(Paul Tillich)라는 한 세계적인 신학자는 그의 책,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 vol. I, Chicago: Univ. of Chicago Press, 1957, Pp. 182-6)에서 ‘자유’와 ‘운명’은 ‘대극’(對極)의 내적 긴장관계를 갖고 있다고 말한 바가 있습니다만, 인간의 태어남과  그리고 죽음은 이와 같은 운명(“생겨라!”와 “돌아가라!”의 신의 명령)과 인간의 자유(“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는 반드시 죽는다.”[창 2:17]와 “죄가 너의 문에 도사리고 앉아서 너를 지배하려고 한다. 너는 그 죄를 다스려야 한다.”[창 4:7]사이의 내적인 대극의 긴장관계에 있다는 것이 성서의 근본 입장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 인간은 창조주의 명령에 의하여 이 세상에 
태어나고, 창조주로부터 받은 그 일생을 그 받은 바의 자유[의지]에 따라 살다가, 창조주의 명령에 따라 그 왔던 흙(‘아팔’/‘따카’)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 성서의 증언입니다. 그러므로 죽음(‘돌아감’) 이후는 전적으로 창조주의 재(再)창조의지와 그의 구원(재창조)에 관한 약속에 달려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즉 그 많은 억조창생의 ‘구원받은 생명들’은, 시 90:1이 증언하듯이, <영원한 우리 주님의 거처 안에서>(‘아도나이 마온 라누’ in our Lord's habitation) 새 창조의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 예수님께서도 “내 아버지의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엔 테 오이키아 투 파트로스 무 모나이 폴라이 에이신, 요 14:2a)라고 말씀하시며 근심하지 말기를 당부하셨기 때문입니다.


4월은 부활주일이 있는 부활절 절기의 달입니다.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모범적’ 재창조-모델의 사건이었으며 오직 창조주 하나님에 의하여서만 가능한 사건이었습니다. 내가 더 살고 싶다고 하여 한 촌음(寸陰)도 더 연장할 수는 없으며 내가 빨리 죽고 싶다고 하여도 또한 역시 한 촌음도 앞당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自殺도 하나의 destiny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모름지기 ‘태어남’과 ‘돌아감’(죽음)의 운명적인 이 ‘신의 명령’을 믿음으로 받아야 하는 것이고 단지 창조주께서 우리에게 ‘자유’와 함께 부여하신 그 ‘한 생’을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부합하는 삶(마 7:21)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성서라는 책은 이 삶의 길이 어떤 길이여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지시하고 있는 유일한 神啓示의 책입니다!’). ‘죽음’은 단지 신의 명령에 속하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가 죽는 것이 아닙니다. 신의 명령이기 때문에 죽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성서는 ‘몸의 부활’을 말할 뿐, 결코 ‘영혼불멸’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의 유일한 희망은 ‘생사’를 홀로 주관하시는 야훼(=창조자) 하나님의 긍휼(출 33:19) 안에만!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십자가의 ‘죽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부활’ 소식만이 복음이고 이것 이외의 그 어떤 다른 것도 그것을 복음이라고 주장하는 자는(그가 사도 바울 자신이라고 하더라도) 그는 저주를 받아야 한다고 사도 바울 자신이 강하게 力說하였던 것(갈 1:6-10!!)은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 15:19)라는 사도 바울의 그 고백도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고전 15:3-8; 행 9:3-5; 22:6-8; 26:12-15) 때문에 비로소 생겨난 것이었습니다(빌 3:7).


‘생’과 ‘사’의 유일한 주관자이신 창조주 하나님에게는(신 32:39; 삼상 2:6) 
죽음이란 절대적 ‘운명’이 아니고 상대적 ‘자유’에 속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삶의 고난’이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그 영광에 견주면 실로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시기만 한다면!! 누가 감히 우리에게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 더욱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이기시고 몸으로 부활하셔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지금도 쉬지 않으시고 [하나님 우편에서] 한결 같이 하나님께 간구하고 계신다면 우리는 과연 그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확신하건대, 죽음도!! 삶도!! 그 밖의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부터는 끊을 수 없을 것입니다.”(롬 8:18-39 참조) -부활절의 달에-(2011. 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