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제목죽음을 극복하는 길 - 창세기 22장에 대한 신학적 반성 1: ‘야훼 이레’ 김이곤 2012-06-072021-10-20 14:53

구약 창세기 22장을 가리켜서 유대인 전통은 특별히 아케다라고 부른다그리고 이 아케다라는 히브리어는 구약 전체에서 오직 여기 창 22장에서만 나타난다이 말의 의미는 희생제물의 발을 묶다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동사(‘qd 창 22:9)에서 기원된 말이다분명발이 묶인 이삭의 모습은 먼 후일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 구원의 대속제물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그 우리 주님의 두 이 포개어져 묶인 채 못 박혀 있는 그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아브라함이 손에 칼을 들고서 그 두 발이 
묶인 외아들이삭을 향해 칼을 겨누고 찌르려고 하는 그 순간그야말로 하늘도 땅도 모두 숨을 죽이든 바로 그 순간하나님의 사자(使者)는 황급히 아브라함을 향하여 아브라함아아브라함아!”(창 22:11)라고 두 번 반복하여 부르고는숨을 몰아쉬며 다급하게,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그 아이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창 22:12)라고 울부짖듯 천사는 부르짖었던 것이다그리하여 만일 그 곳이 모리아 산(산정(山頂=非 聖所)이 아니고 성소였더라면마치 먼 후일 지성소와 성소를 구별하는 휘장이 찢어지듯(마 27:51; 막 15:38; 눅 23:45), 그렇게 그 제의(祭儀성소의 휘장도 또한 찢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죽음을 극복하는 길이란알고 보니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우리의 성서본문 기자는 바로 여기서(창 22:12c14) 다음 세 가지의 주요한 사건을 지적하였기 때문이다첫째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믿음을 갖고 있는 것을 본 하나님의 사자가 아브라함을 향하여 네가 하나님 두려워하는 줄을 내가 이제[알았다.”라고 말하였다는 것(창 22: 12b), 둘째는 하나님에게 번제로 드리려든 그 아들’ ‘대신 숫양 한 마리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셨다는 것(창 22:13), 그리고 셋째는 아브라함이 이런 일을 경험한 이곳의 이름을 야훼 이레’(=‘여호와 이레)라고 이름 붙였다는 것 등이었다(창 22: 14).


이 세 가지 사건은 창세기가 말하고 있는 아브라함 생애에 관한 증언 중
아브라함 생애의 절정(climax)에 해당하는 것으로서모리아 산에서 일어났던 일이다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조차도 그의 생애의 절정에서는이와 같이결정적인 한 시험(test)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그런데이 시험을 가리켜 창 22장의 성서기자는 놀랍게도 하나님이 주신 시험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이것은 분명 신학적 쟁점이 되는 것이라고 하겠다..


구미
(歐美)의 많은 대표적 구약학 학자들은 여기서 이 <‘하나님이 주신’ 시험>의 신학적 의의를 특별히 강조해왔다하나님이 인간을 시험(test)에 빠뜨리신다니분명성서 문헌으로서는 처음 대면하는매우 새로운 신학적 이슈이기 때문이다오늘 날의 기독교 교인들에게는저 아득한 옛날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조차 감히 이러한 일이 일어났었다는 보도는 충격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비록 여기서 말하는 시험’(test)이라는 말이 주기도의 시험’(temptation)과는 그 의미가 다르다고는 하더라도하나님이 사람을 시험’(test)하신다는 것은 어쨌든 우리에게는 하나의 걸림돌이다왜냐하면, ‘시험비록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은 하나님께서 허락지 아니 하신다는 말씀(고전 10:13)도 있기는 하지만많은 아픔[苦難]을 반드시 동반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그의 인생을 마감하는 그 인생 절정에서는그는사람이면 어느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엄청난 시험에 직면하게 된다왜냐하면 나이 100세에 얻은 그 외아들을 그 주신 자“ 자신이신 하나님께서 도로 제물로 내어 놓으라고 명하셨기 때문이다아브라함은 곧 모리아 산으로 오른다그러나 이 모리아 산 등정(登頂)분명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일 다음에! 일어난 일이었다.(wayehî ’aḥar : Now it happened after , cf. C. Westermann, Genesis 12-36, 352-353)

 

실제로아브라함이 살던 그 고대나또는 이 고대 이야기를 쓰고 있는 성서기자(E)가 살던 그 시대나 간에심지어는 오늘 날에 이르기까지도우리 자신의 믿음의 한계에 대한 질문은 신앙인들의 신앙 역사(信仰 歷史)에서는 일종 최대의 시험’(test)이라 아니할 수 없다. “나의 믿음의 정도는 과연 어디쯤에 도달해 있는 것일까?” “내가 믿고 있는 하나님은 자신에 대한 어느 정도의 충절(忠節)을 원하시는 신()이신가?”라는 질문은그것이 극대화될 때는이 시험(test)은 곧장 고통스러운 시련’(試鍊)으로 전이(轉移)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 종탑들이 마치 바벨탑은 저리 가라고 할 정도로 높고 또 높은 것을 우리가 보는 것은 그리 새삼스럽지 않으며바로 여기에 사람이 헤어나기 어려운 한 미로’(迷路)가 있게 마련이다.


아브라함은 그의 믿음이 그 신앙적 삶의 절정 및 결실기에 이르렀을 무렵
예기치 못하게도하나님으로부터 그가 100세에 받은 그 외아들 이삭을 번제제물로 내어 놓으라는 요구(창 22:2)를 받는다.


자기 
믿음의 정도(程度)에 대한 평가는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신앙인들의 세계에서는 최대의 관심일 수 있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고 하겠다. “누가 뭐래도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고 젊은이들은 노래하고는 있지만과연그러한가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희망 사항일 뿐노래하는 그들 자신도 그 미래를 모르는 것이 이 시대의 실상이다한국의 정치경제사회가 온통 카오스’(Chaos)실상이 이러한데도 그들은 노래하고 춤추는 일에 몰두한다.(그 노래와 춤이 그토록 전문화되고 세계 각 곳에 한류열풍을 일으킬 정도이면 지극히 전문화되지 않고는 그렇게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우리 사회가 카오스라는 이 확신은 이 지구촌 곳곳에서 일고 있는 자연재난들이 바로 그것을 입증하고 웅변해준다이 흐름을 멈추게 할 자는인간 중에는 없다단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신 32:39; 삼 2:6 참조).


아브라함은 결단한다
그것은 죽음을 각오한 결단이었다만일 하나님의 사자가 아브라함의 그 칼 든 손을 제지하지 않았더라면아들도 죽고 아들이 죽은 바로 그 자리에서 아비(아브라함도)도 죽었을 것이다그러므로 <모리아 산정으로 오르는 그 길>분명,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였다말하자면 우리 주님 예수께서 골고다(=갈보리산정으로 오른 바로 그 길이기도 하였다산정에 오르자 아브라함은 즉시 <아들[의 발]을 묶어서> (waya‘aqod제단 장작 위에 올려놓고 칼 잡은 손을 들고 아들을 향해 내려치려 하였다하늘도 땅도 잠간 그 숨을 멈추는 순간이었다.


그 때
하나님의 사자(使者天使)가 황급히’ 칼 든 아브라함의 팔을 제지하면서 아브라함아아브라함아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그 아이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라고 말하였다이 천사의 말 속에 나타난 이중의 중복은 일의 다급함과 중요성을 나타내는 수사적 표현이다그리고는 ① 아브라함의 그 하나님[하늘]을 두려워하는 신앙을 칭찬하시는 하나님의 뜻(=말씀)을 전한다그리고 ② 아들을 잡아 번제로 바치는 일 대신에 숫양을 번제물로 보여주었다이른 바사람(주로 자식[子息])을 죽여 번제로 바치는 것 대신에! 동물 번제를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전달된 것이다마지막으로는 ③ 아브라함이 이 일(사건)이 일어난 그 곳의 이름을 야훼-이래’(=여호와-이레)라고 명명(命名)하였다는 것이다이 세 가지 사건(①②③)이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우리의 기본 주제(=죽음을 극복하는 길)에 대한 바로 그 정답이라고 하겠다.


모리아 산 사건의 증언의 결론은 바로 이것
즉 <죽음을 극복하는 길>에 관한 증언이다그것이 바로 창 22:12-14의 주요 내용이며이 내용은 위에서 이미 암시한 바대로 다음 세 가지 사건을 소개한다즉 다음의 ①②③이 바로 그것이다즉 ① 하나님(=하늘)을 두려워하는 아브라함의 믿음② 아들번제 대신에 숫양번제를 드리는 종교/제의(宗敎/祭儀)의 개혁그리고 ③ 야훼 이레(=여호와 이레선포가 바로 그것이다.


아브라함의 경우그가 마치 죽음보다 더 가혹하게 느꼈었던 그 ()의 시험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그 첫 번째 동력은 하나님(하늘)에 대한 두려움 신앙이라는 구약 최대의 경건(출 1:17,21)을 그가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이것이 인간구원의 시작점이었다아브라함은 하나님(하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여 그가 그 무슨 특별한 신앙형식을 따로 갖추고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그는 하나님(하늘)에 대한 두려움즉 자기 양심에 대하여 진실한 자였다결국 그는 하나님’(하늘)에 대한 경외’(敬畏)가 모든 지식과 지혜의 근본(根本잠 1:7)임을 이미 잘 알고 있었던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아브라함이기에오히려 그는 한 단계 위로 그의 신앙 수준을 향상시킬 수 있었다즉 그는 여기서 <자식을 번제물(燔祭物; ‘ôlᾱh)로 드리는 이교(異敎)의 희생제의>를 철폐하고 그 대신! 그것을 <동물번제의 희생제의(犧牲祭儀)>로 바꾸는 종교/제의개혁[宗敎/祭儀改革]을 단행한 자의 조상이 되었던 것이다물론우리 시대는 자식을 번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는 종교적 열정을 실천하는 사람이나 그러한 종교행위를 위대한 신앙이라고 문자적으로 믿는 신앙인은 없겠지만그러나 이러한 잘못된 신앙적/종교적 열정을 추구하는 신앙인들 이른 바광신/열광주의자들-은 오늘날도 얼마든지 있다구약에서는 바알주의’(Baalism)가 그 대표적인 것이다(왕상 18:25-29). 21세기도 또한 신형 바알주의(물량신앙/교회주의 신앙 등등)가 오늘 교회를 지배하는 대세(大勢)가 되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즉 이삭을 살린 것은(=우리를 죽음에서 살리는 것은인신희생제(人身犧牲祭)를 거짓종교로 보고 그것을 과감히 철폐한 곳(제의개혁[祭儀改革])에서만 비로소 가능하였던 것을 우리는 직시(直視)하여야 한다.


아브라함은 또한 이러한 놀라운 사건즉 그의 신앙적 승리가 일어난 이곳을 가리켜 야훼-이레’(=‘여호와-이레’)라고 하였는데이 말은 야훼-예라에라는 본래의 히브리어 글자(YHWH yērᾱ’eh; 마소라[Massora] 본문)를 시리아 역본과 라틴어 역본의 번역(‘야훼께서 보실 것이다/야훼께서 준비하실 것이다’ Yahweh will see.)에 따라 읽었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다그러나 이 단어는 히브리 마소라’ 본문의 뜻(Yahweh will be seen=Yahweh will appear.)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옳다고 나는 본다비록 두 번역(야훼께서 보실[마련하실/준비하실것이다와 야훼께서 나타나실 것이다.”)이 모두 가능하기는 하나나로서는의 번역이 더 나은 그리고 더 옳은 번역이라고 본다왜냐하면 이러한 죽음다시 삶의 구원사건은 하나님께서 나타나시는 곳[‘야훼 예라에’=‘하나님의 현현 장소’]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깊도다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롬 11:33)